옥천 육씨(沃川陸氏)는 충청북도 옥천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따르면, 옥천 육씨(沃川陸氏)의 시조(始祖) 육보(陸普)는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927년(고려 태조 10년, 후백제 견훤 28년, 신라 경순왕 원년) 후당(後唐)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천하·정한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후삼국시대의 한반도에 동래(東來)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중간 계대(繼代)를 실전(失傳)하여 고려 충렬왕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육인단(陸仁端)을 1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옥천(沃川)은 충청북도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고쳤고, 1313년(고려 충선왕 5년)는 옥주(沃州)로 승격했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는 옥천으로 개칭하고 경상도 관할에서 충청도로 변경하였다. 《세종시록지리지》에 충청도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육(陸)·황(黃)·전(全)·신(申) 4성이 기록되어 있다. 1896년 충청북도 옥천군이 되었다.
육인단(陸仁端)의 손자 육거원(陸巨遠)의 아들 대에서 덕곡공파(德谷公派)·목사공파(牧使公派)·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낭장공파(郎將公派)로 분파되었다. 맏아들 육려(陸麗)는 덕곡공파(德谷公派), 둘째 육항(陸沆)은 공주목사공파(公州牧使公派), 셋째 육비(陸埤)는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넷째 육수(陸綬)는 낭장공파(郎將公派)로 크게 갈라졌고, 막내인 육태귀(陸台貴)는 손자대에서 후손이 끊겼다.
덕곡공파(德谷公派)의 육려(陸麗)는 고려 말에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왜적(倭賊)을 격퇴하는 데 공(功)을 세워 크게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이 개국(開國)하자 절개를 지켜 벼슬을 버리고 충남 공주 덕리(德里)에 은거(隱居)하였다. 그의 손자(孫子) 육명산(陸命山)은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으며 후대에 내려가 다시 석동계(石同系)와 석정계(石貞系)로 나뉘어 조선조(朝鮮朝)에서 충의(忠義)의 전통을 이었다.
목사공파(牧使公派) 육항(陸沆)의 맏아들 진(晉)의 후손에서 부위(副尉)를 지낸 육저(渚)와 제주목사(濟州牧使) 육한(陸閑), 동래현감(東來縣監) 육세영(陸世英), 조선(朝鮮) 정조(正祖) 때 유학자 육상지(陸相贄) 등이 있고, 둘째 상(常)의 후손으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육춘수(陸春秀), 만호(萬戶) 육석(陸碩)과 선조(宣祖)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육성우(陸成禹) 등이 있다.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는 육비(陸埤)의 아들 애(涯)가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두 아들 부사 육지와 참봉(參奉) 육헌(陸軒)의 대(代)에서 다시 두 파로 갈라졌다.
낭장공파(郎將公派)는 조선 명종(明宗) 때 장사랑(將士郞)을 지낸 육한종(陸漢宗)과 선조(宣祖)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역임한 육붕(陸鵬)이 대표적이며, 숙종(肅宗) 때 학자 육홍(陸鴻)은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저서(著書)로 「석정유고(石亭遺稿)」를 남겼다.[1]
진(鎭)
수(修)
순(淳)
영(永)
동(東)
연(然)
열(烈)
기(基)
정(錠)
원(源)
모(模)
훈(熏)
배(培)
호(鎬)
옥(沃)
주(柱)
환(煥)
중(重)
일(鎰)
기(沂)
옥천 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7명, 생원·진사 11명을 배출하였다.[2]
육대춘(陸大春)
육억구(陸億龜) 육자흘(陸自屹) 육중수(陸重秀) 육중휘(陸重輝) 육진성(陸震聲) 육천구(陸千龜) 육충립(陸忠立)
육공달(陸公達) 육금석(陸金石) 육대붕(陸大鵬) 육병란(陸炳蘭) 육상룡(陸相龍) 육치(陸峙)
육용필(陸用弼) 육종윤(陸鍾允) 육지원(陸祉遠) 육해원(陸海源) 육홍운(陸鴻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