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수많은 행정구역이 분리되어 독립해나갔으며, 마지막으로 남은 시흥군은 1989년1월 1일시흥시, 군포시, 의왕시 등 3개시로 분리·승격하면서 폐지되었다. 현재의 시흥시 지역은 구한말까지 원래 안산군과 인천부(일제강점기 이후 부천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결과적으로 시흥이라는 명칭만 이어질 뿐 대한제국 시기까지의 시흥군 지역과는 다른 곳이 되었다.
유래
시흥의 첫이름은 잉벌노(仍伐奴)이고 나중에 곡양(穀壤)이 되었는데, 이 둘은 사실상 같은 표기이다. 잉벌(仍伐)과 곡(穀)은 고대에는 다 같이 "늠"으로 읽히고, 노(奴)와 양(壤)은 고대에는 "나"나 "내"로 읽혔기 때문에 순우리말로는 "늠내"가 된다. 이 늠내는 "뻗어나가는 땅"이라는 의미도 있어서 현재의 "시흥"이라는 이름과도 상통한다.[1]
역사
안양시, 군포시, 과천시, 동작구 동부, 서초구 서부 지역의 1914년 이전의 역사는 과천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오늘날의 영등포구, 구로구 동부, 관악구, 동작구 일부, 금천구, 광명시 및 안양시 일부 지역은 고구려 때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던 것[13]을 신라경덕왕 때 곡양(穀壤)[14]으로 고쳐서 율진군(栗津郡) 속현이 되었다. 고려 초에 금천(衿川, '衿'을 '黔'이라고 쓴 기록도 있다)으로 고쳤고,[2]성종이 단련사(團練使)를 설치하였는데 목종이 폐지하였다. 현종 9년(1017년)에 수주(樹州)에 예속되었고, 명종이 비로소 감무를 설치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태종 14년(1414년)에 과천(오늘날의 동작구, 서초구, 안양시, 과천시, 군포시 지역)과 병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만들었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고, 또 양천(오늘날의 강서구, 양천구 지역)과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으로 만들었는데 한 해 만에 혁파하였다. 태종 16년(1416년)에 금천현(衿川縣)으로 고쳐서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 과천과 병합했다가 얼마 못 가서 복구하였다.[15] 이후에는 금천(衿川)이라고 하였는데, 금천현은 현내면, 동면, 서면, 남면, 상북면, 하북면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동면에 상도리, 봉천리, 신림리, 난곡리, 문교리 등이, 상북면에 당산리, 양평리, 선유봉리, 하북면에 방학호리, 고사리 등이 속해 있었다.[16] 참고로 현내면은 지금의 금천구, 상북면과 하북면은 지금의 영등포구, 동면은 지금의 관악구와 동작구 일부, 남면은 지금의 광명시 서부, 서면은 지금의 광명시 동부에 해당한다. 1795년(정조 19)에 금천현이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고종 32년) 윤 5월 1일, 23부제의 실시로 시흥현이 시흥군으로 개편되어 인천부에 속하였고,[17] 이듬해 13도제의 실시로 도(道)가 부활해 다시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의 시흥시 남부 지역은 현재의 안산시 지역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는 처음 장항구현(獐項口縣)현으로 명명되었다가 통일신라 시기인 757년에 장구군(獐口郡)으로 개칭되었고, 940년에 안산군(安山郡)이 되었다. 지금의 시흥시 북부 지역은 현재의 인천광역시 남부 지역('원인천')과 마찬가지로 삼국시대에는 처음 미추홀(彌鄒忽)로 명명되었다가 매소홀현(買召忽縣)이 되었고 통일신라 시기인 757년에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된 후 율진군(栗津郡; 지금의 과천시)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1018년에 수주(樹州; 지금의 부평구)의 속현이 되었다. 1105년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 이 씨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어 수주(樹州)에서 분리되었다. 고려 인종때에 인종 왕해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 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가 되었다가 경원부와 인주군으로 차례대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41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주군이 인천군(仁川郡)으로 개명되었고, 1460년에 인천군이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로 승격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금천구 일대는 1963년까지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관아가 위치해 금천현의 중심지였고, 1910년까지 시흥군청이 위치했다. 1911년, 영등포로 군청이 옮겨지면서 영등포가 시흥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시흥군의 중심지 기능을 잃은 시흥리 지역은 1963년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으며, 과거 이 곳이 시흥군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은 시흥동이라는 지명에 남아 있다. 반면, 현재 시흥시의 행정구역명은 서울특별시 금천구 지역에서 따온 '시흥'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지만 원래의 시흥(현재의 영등포, 구로, 관악, 금천, 광명)과는 행정구역 및 생활권이 다른 지역이다.[18][19]
1970년대부터 1980대까지 시흥군 지역은 서울, 인천, 부천, 수원 등 인근 도시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발달한 전형적 전원형 도시로 발전하면서 거듭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는데, 급격한 산업화와 서울의 팽창으로 인한 인구 유입으로 안양시를 시작으로 광명시(1981년), 안산시(1986년), 과천시(1986년)가 시로 승격해 분리되었다. 1980년 소래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시흥군은 안양시와 연계되어 발전한 동부(군포읍·의왕읍), 수인산업도로 등으로 도로교통이 발달한 서북부(소래읍), 반월공단 등 계획도시로 건설된 서남부(현 안산시)가 각각 독자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1986년에 안산시가 설치된 이후, 시흥군을 폐지하고 시로 승격시키는 방안으로는 의왕읍의 일부(내손·포일·청계·학의리)를 안양시에, 수암면의 일부(수암·장상·장하·화정리)와 군자면의 일부(정왕·죽율·군자·거모리)를 안산시에 편입시키는 것을 전제로 군포읍과 의왕읍을 합쳐 시흥시를, 소래읍에 수암면과 군자면을 합쳐 소래시를 설치하는 2개(시흥·소래)시 분리안과 군포읍, 의왕읍을 각각 군포시, 의왕시로 승격시키고 나머지 지역(소래읍·수암면·군자면)을 시흥시로 승격시키는 3개(시흥·군포·의왕)시 분리안이 논의되었는데, 행정관료들이 선호한 3개시 분리·승격안이 채택되었다.[20]
1989년1월 1일에 시흥군이 폐지되고, 시흥시(소래읍·군자면·수암면 일원), 군포시(군포읍 일원) 및 의왕시(의왕읍 일원)가 설치되었다. 현재의 시흥시 북부(옛 소래읍)는 1973년7월 1일에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시흥군에 편입되었고 남부(옛 군자면·수암면)는 안산시와 밀착해 성장했기 때문에 시 승격 당시에 두 지역은 교통과 생활권이 사실상 분리되어 있었고,[21] 그러한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 1 : 구한말의 광주군과 인천부 지역은 1914년부터 1989년까지의 기간 동안 시흥군에 속한 적 있는 지역만 추려서 위 도표에 정리하였음. 나머지 광주군 지역은 현재 서울특별시 강동권(강남구·송파구·강동구), 경기도 광주시·성남시·하남시이며, 나머지 인천부 지역은 현재 인천광역시 남부임.
※ 2 : 구한말의 안산군 지역 중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에 수원군(이후 화성군) 반월면으로 이관된 지역은 위 도표에서 제외하였음. 해당 지역은 시흥군에 속한 적이 없으며, 후일에 안산시 및 군포시에 편입됨.
1899년, 과천군 하북면 노량진리에 지어진 노량진역에서 제물포역을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이때 노량진역 이외에도 영등포역이 영업을 개시하였다. 1901년8월 21일, 영등포역에서 경부선 착공식이 거행되었고 1905년 개통되었는데, 경부선은 시흥군의 시흥역, 안양역, 군포역을 거쳐 수원역으로 노선이 이어졌다. 경부선이 부설되고 1911년에 시흥군청이 영등포리로 이전하면서 한촌(閑村)이었던 영등포리가 교통, 상업의 중심지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밖에 시흥군을 거치던 노선으로는 수인선이 있었다. 1977년에는 수인산업도로가 개통되어 시흥군의 주요도로로써 인근 도시들을 연결하는 중심역할을 했다.
산업
취락의 형성이 극히 미미했던 영등포 지역이 번잡해지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부터였다. 조선 피혁 주식회사, 경성 방직 회사 등이 이 지역에 설립되면서 곧이어 많은 공장들이 가동했다. 당시 영등포 지역에 공장이 집중적으로 설립된 것은 본래 이 지역이 한강과 안양천으로 둘러싸인 범람원으로서 염가로 토지를 매입할 수 있었고, 경인선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철도교통이 편리했기 때문이다.[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