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5년, 부황 휘종은 금나라와의 외교정책에 실패하여 금나라가 북송을 정벌하려고 대군을 일으켜 공격을 하였다. 이 사태에 휘종은 자기칙당(사직서)을 내고, 제위를 황태자 조환에게 양도하고 태상황이 되었으며. 황태자 조단은 황제에 등극하니 흠종이다. 다음해 금나라가 개봉을 포위하자 흠종은 이강(李綱)을 등용하고 방어를 했지만, 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금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었다.
정강의 변
그러나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송나라의 관리들 사이에서 금나라에 대하고 강경론이 대두되게 되고, 배상금과 영토 분할을 거부하도록 방침을 바꾸었다. 송나라의 배신에 금나라는 다시 한번 개봉을 공격하고, 함락시켰다. 휘종과 흠종은 금나라 군에 의해 포로가 되고(정강의 변), 1128년에 한주(길림 성 리수현)을 거쳐 1130년에 동북의 흑룡강성 의난현으로 끌고 간다.
이때 남송의 재상 진회(秦檜)도 같이 끌려가게 되는데, 이후 탈출하여 남송의 재상이 되었을 때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책없는 강경론을 기피하는 계기가 된다.
최후
1127년, 흠종의 남동생 조구가 고종으로 즉위하여 남송을 세우고, 흠종은 복잡한 입장에 처해진다. 흠종의 남송 귀환이 인정되면, 고종은 제위 찬탈자가 되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역대 왕조 가운데에서도 특히 정윤론(正閏論)이 엄격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금나라의 측근들도 흠종 귀환을 계획했지만, 고종으로부터 억류 요청이 완곡하게 나오게 되었고, 결국 남송으로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고종의 생모인 위 부인이 남송에 귀환했을 때에도 흠종은 위 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남송으로의 귀환을 고종에게 의뢰하도록 눈물로 탄원했다고 전해진다.
흠종은 그 후도 30년 이상에 걸쳐 동북에 계속 감금되었고, 1161년에 오국성에서 61세로 병사했다. 그 후 흠종의 자손은 해릉양왕에 의해 살해되고, 대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