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묘(文廟)는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자로 공자(孔子)의 신위를 받드는 묘우(廟宇)를 말한다.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묘(廟)는 무덤 묘(墓)가 아니라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사당(祠堂)을 뜻하며, 동아시아 전반에 분포해 있다.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하여 4성(四聖)을 배향(配享)하고, 공문 10철(哲) 및 송조 6현(賢)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의 동방 18현을 종사(從祀) 하였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제례 의식인 석전제(釋奠祭)를 거행하고 있다. 태학생(太學生)들의 사표로 삼았다.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므로 문묘 종사의 기준은 당연히 공자의 도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얼마만큼 공헌했느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있었던 문묘 종사는 대부분 도학(道學)의 실천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선비만이 당당히 공자의 옆자리에 종사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6]
이와 같이 역사가 선택한 동방 18현인은 권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문이 좋다거나, 벼슬이 높다고 해서 선정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 중에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벼슬과 출세를 마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여 역사책에서 조차 흘려버리는 당대 석학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났느냐, 누가 더 유명하냐가 아니다. 모두 나름대로 독창적인 자신의 학문 세계를 구축하고, 학자와 선비로서 양심과 도덕을 실천했느냐이다. 따라서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고, 학자로서 후세에 존경을 받고, 학문적 업적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크고 높아야 선정되었던 것이다.[7]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문묘 종사 인물을 정하는 일은 학통·당파·정치 정세 등에 따라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출향되거나 복향되기도 하였으며, 위차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정몽주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섬겼다는 이유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의심 받았다. 선조와 광해군 년간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5현의 종사시에 김굉필은 절조와 경학이 뛰어났으나 짧은 생을 살다 죽어 성경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훈구파의 격렬한 반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처신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출처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이황 또한 소년 시절 기생과의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이는 한때 불교에 몸 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고, 성혼은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처신 때문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둘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 되었으며, 김장생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여기에 관련되어 논란이 계속되다가 1717년(숙종 43)에 종사 되었으며, 영조 때의 송시열·박세채의 종사 때에도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또한 성리학 외에 노장 사상이나 양명학 등 이단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인물들은 철저히 배격됐다. 서경덕이 그 대표적 예였다.[8]
그리하여 문묘 종사에 있어서 자격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비교적 자유스러웠던 인물들은 김인후 등 몇몇 뿐이었다. 이와 같은 문묘 종사는 단순히 선현에 대한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는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붕당의 명분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로까지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학문적인 깊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문묘 서차는 먼저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를 정위로 하여 남쪽을 바라보게 하고, 그 앞에 안자·증자·자사·맹자의 4성을 동서로 나누어 배향하였다. 공문 10철[9]과 송조 6현[10] 및 우리나라 동방 18현을 종사하였다.
조선조 문묘 관장은 성균관에서 하였다. 성균관의 이런 건물들을 묘우(廟宇)라고 한다. 묘우의 주요 건물은 대성전으로서 좌우에 동무·서무라는 부속 행랑을 두어 예배 대상자를 봉안한다. 그리고 향사때의 헌관과 집사들의 재계소이자 향축을 봉안하기 위한 곳으로 향관청이 있다.
향사 일자는 중춘와 중추로 나누어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을 석전일로 정하였으며, 동방 18현의 서원에는 중정일(中丁日)에, 그 밖에 서원에서는 춘추 음력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이나 중정일(中丁日)로 정하여, 성균관·향교의 석전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향사일이 국기(國忌)와 상치되면 그 다음의 정일(丁日)로 잡았고, 국상(國喪)이 나서 인산(因山)이 마쳐지지 않으면 신위에 고유하고 향사를 행하지 않았다. 또한 삭망 분향일이라 하여 매월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성균관의 대사성·관관·유생들이 문묘에 나아가 분향 의식을 올리는 행사일이 있었다. 이 밖에 공자 탄강일인 음력 8월 27일에 올리는 향사는 가장 컸으며, 왕이나 세자가 직접 향사에 참례하는 친림석전·친림작헌·왕세자석전 등이 있고 고유제·위안제가 있다.
향사 절차는 성균관 대사성을 헌관으로 초헌관ㆍ아헌관ㆍ종헌관과 축ㆍ찬자ㆍ알자ㆍ찬인ㆍ사존ㆍ봉향ㆍ봉작ㆍ전작 등의 여러 집사들이 선임되어 향사 3일 전에 재계에 들어간다. 제복을 착용하고 제물을 차린 뒤 전폐례ㆍ초헌례ㆍ아헌례ㆍ종헌례ㆍ음복례 및 망예례의 단계로 진행한다. 서원으로 내려오면 더욱 간략하지만 대동소이하다. 의식이 끝나면 음희례를 하고 강론함이 보통이다.
문묘는 공자와 4성을 비롯한 공문 10철 및 송조 6현과 우리나라의 신라·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나라에서 공인한 최고의 정신적 지주에 오른 동방 18현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문묘 종사는 유학자로서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이자 이상이며 최고의 명예로운 자리이다. 따라서 정공신이나 종묘 배향 공신들 보다 더 높은 명예를 누렸으며, 만인의 칭송을 받는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다.
옛말에 "정승 3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3명이 문묘배향 현인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三政丞이 不如一大提學이요, 三大提學이 不如一文廟配享(賢人)이라.】
그리하여 문묘 배향 현인을 배출한 각 가문은 그 어느 권문세가를 뛰어 넘는 국반(國班)으로서 대대손손 더 없는 영예로 알았다.
문묘가 있었던 교육기관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