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모레노 아란사디(바스크어: Rafael Moreno Aranzadi; 1892년 5월 23일, 바스크 주빌바오 ~ 1922년 3월 1일, 바스크 주 빌바오)는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로, 공격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아틀레틱 빌바오에서 활동하였다.[3] 그의 별칭은 바스크어로 "작은 오리"를 뜻하는데, 이 별명은 그의 왜소하고 가냘픈 체구에서 비롯되었다.[4]
클럽 경력
피치치는 비스카이아 도빌바오 출신으로, 피치치는 1913년 3월에 첫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 출전했는데, 그가 유일하게 활동한 구단은 라싱 이룬에게 0-1로 패했다. 몇 달 후인 8월 21일, 그는 레알 우니온으로 개칭한 같은 상대를 맞이하여 산 마메스 개장 경기를 치렀고, 그는 신구장에서의 첫 골을 기록한 주인공이 되었다.[5] 두 달 후, 그는 레알 소시에다드 신구장 아토차의 개장 경기에서도 첫 골의 주인공이 되었다.[6]
머리에 흰색 천조각을 매서 경기장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7] 피치치는 이후 5번의 국내 컵 대회 결승전에 출전했는데, 이 중 4번을 우승하였고, 에스파뇰과의 1915년 결승전에서는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아틀레틱의 5-0 대승을 견인했다.[8][9]
1920년 하계 올림픽을 마치고 귀국하고 나서, 몇몇 지지자들은 그의 '거성'과 같은 활약에 견주어 볼 수 있는 활약을 하지 못한다는 혹평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선수 활동을 갑작스럽게 마치고, 심판일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2년 3월 2일, 그는 급성 티푸스로 29세에 요절하였고,[10][8] 피치치의 요절 소식을 들은 지지자들은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고, 자신들의 영웅을 떠나게 만든 폭언을 한 것에 대한 후회감이 고조되었다.[8] 그는 선수 시절에 뛴 유일한 구단 소속으로 89번의 경기에서 83골을 기록했다.[11]
피치치의 부친은 빌바오의 시장을 역임했으며,[8] 삼촌은 문학가 미겔 데 우나무노였다.[12] 그와 그의 훗날 아내가 되는 여인은 아우렐리오 아르테타의 시대를 넘는 작품으로 영원히 전해지게 되었다. (비록 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의 동료였던 호세 마리아 벨라우스테이나, 피치치의 사후 이 그림은 피치치와 그의 약혼녀로 전해지게 되었다)[13][8]
1926년, 피치치를 기리기 위한 흉상이 산 마메스 경기장에 세워졌다. 흉상이 세워진 후, 경기장을 처음 찾아오는 원정 선수단은 흉상 밑에 꽃다발 한 아름 내려다 놓아 예의를 표하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잡았다.[14]아틀레틱의 신구장에 수용 가능할 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15] 흉상의 부지가 선수 입장 통로 옆으로 확정되면서, 전통이 2013년에 신 구장을 지으면서도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