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에는 둥베이 지역에 건너가 공산당 해방구 건설에 참여하였고, 1949년 중공 정권 성립 전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공산주의 혁명 활동을 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하에서 1958년~1966년 중국 공산당 기관지 <훙치(紅旗)> 상임 편집위, 부총편집 등을 맡았고, 1959년 이후 <마오쩌둥 선집(毛澤東選集)> 편집위원 (편집위 부주임: 캉성)으로 제4권의 교열 등 다수의 당문헌 출간 사업에 참여하였다. 1977년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덩샤오핑•후야오방 정권에서 1982년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1982년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 1987년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촉발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역사 허무주의 (소외) 담론과 잉여 성원들의 계속적인 발생에 있어서의 그의 중국 공산당 내 오랜 정치적 이데올로기 우위와 퇴임 후 그의 중공 고문위원회에서의 정치적 입지는 마침내는 후야오방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죽음 이후로 벌어지게 된 1989년 천안문 사건에서 중공 학생들의 전국적 청년 마오쩌둥주의 반부패 시위 운동을 무분별하게 확대시키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