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1945-08-15) 을유광복 후, 1947년 3월 5일 (1947-03-05) 삼팔도선(38선)을 넘어 당시 미군정 조선 시대의 수도 서울로 이주한 월남자 출신으로 1985년 2월 이후부터는 연세대학교철학과 명예교수(그는 2020년 1월 이후 백세인)를 지내고 있다. 그는 연세대학교철학과 교수(1985년 2월 이후 동교동과 명예교수·1988년 8월 당시 동교명예철학박사학위 취득.), 미국시카고 대학교철학과 연구교수 및 하버드 대학교철학과 교환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미국 텍사스 주에 소재한 오스틴 대학교의 철학과 객원교수 등으로 출강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서양 철학자 1세대로 불리는 원로 철학자 겸 대학 교수이기도 하다.
1947년 당시 북괴에서 피치못할 갈등 직후 일가족 및 이웃들과 함께 평양 탈출, 그리고 황해도에서 목숨을 건 월남
1944년 당시에 병으로 부친상을 치른 이듬해 1945년 을유광복(8·15 해방)으로써, 이른바 태평양 전쟁에 주요 참전했던 일제가 패하여 망한 뒤에, 갑작스레 북괴에 소군정이 들어와서 북한이 갈수록 소련(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이른바 공산주의화가 되어가자 장로교 평신도인 그(김형석 교수)는 차라리 다른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남은 신앙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해서 1947년 2월 8일 (1947-02-08) 당시에 과부 홀어머님(훗날 2003년 3월 하세.)과 부인 김옥수(훗날 2003년 5월 상배.)과 큰딸(김성예[주 1] 교수)과 큰아들(김성진[주 2] 교수)을 비롯한 일가족들과 그 당시에 평안남도(平安南道)의 룡강(龍岡)을 일단 탈출하여 평양(平壤)으로 잠시 피신했던, 경신년생 원숭이띠 동갑내기 동료 프로테스탄트 평신도 안병욱(安秉煜)[주 3] 교수와 이당 안병욱(怡堂 安秉煜)의 과부 홀어머님과 역시 이당(怡堂)의 과부 홀외조모 등을 비롯한 한두어명의 개신교계 대선배 및 동료 기독교 성도 등과 함께 모두 8명이서, 평안남도평양 탈출을 감행하여 시골 벽지로 다다름 끝에, 황해도(黃海道)의 북부 권역의 수안군(遂安郡)에 당도, 자신의 일행 8명 모두 황해도의 수안군의 예성강(禮成江)의 선로(船路)에서 허름한 한 척의 배를 이른바 꼽사리로 얻어 타고, 경기도(京畿道)의 개풍군(開豊郡)의 서면(西面)의 연산리(淵山里)의 벽란도항(碧瀾渡港)에 당도하여(마지막 북괴(북한)의 영토 벽란도 끝으로 다다름), 그곳에서 모두 재차 낡은 배를 꼽사리로 갈아 타고 드디어 황해(黃海)의 해상 삼팔도선 남쪽으로 다다름하여 일단 당도한, 경기도(京畿道)의 강화군(江華郡)의 교동면(喬桐面)에서 마지막으로 모두, 중고 어선(中古 漁船)을 빌려 갈아 탑승한 직후, 영종도(永宗島)를 마지막으로 경유하여, 경기도(京畿道)의 인천부제물포(仁川府 濟物浦)의 월미도(月尾島)에서 항로(航路)를 최종 당도함에 성공, 마지막으로 중고 어선에서 모두 마지막 발을 떼어, 수중에 남아 있는 액수로써, 자신의 일행들 8명 모두 경인선 열차(京仁線 列車)를 무작정 탑승하여, 1947년 3월 5일 (1947-03-05) 당시, 미군정 시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특별자유자치시로 월남했다.
1947년 3월 5일 (1947-03-05) 월남 이후 사흘 지난 1947년 3월 8일 (1947-03-08), 그의 동갑내기 붕우(朋友)인 이당 안병욱(怡堂 安秉煜) 교수는 잠시나마 자신의 모친과 외조모, 이토록 함께 셋이서만 동반하여, 38선이남강원도춘천 지역으로 떠난즉, 지난 1937년 아직 일제 시대강원도(江原道)의 춘천군(春川郡)으로 시집 떠난, 1947년 당시 을묘년생 만32세 친누나 순흥 안씨[주 4] 부인(順興 安氏 夫人)의 남쪽 강원도 시댁(媤宅)이기도 한[주 5] 지역의[주 6]순흥 안씨[주 7] 부인(順興 安氏 夫人)의 강원춘천 시댁(江原 春川 媤宅)으로 잠시만 떠나 가서, 세명의 식객(食客)인양 강원도 춘천 지역에 잠시 피신 및 기거하였었다.
1947년 월남 이후의 대학 강단 생활
1947년 9월부터 1954년 2월까지 만으로 어언 7년 남짓 동안, 서울중앙중·고에서 국어 교사와 교감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정진석(故) 추기경이야말로 본인(김형석)의 중앙중학교 교사로 재직 당시 상당히도 걸출한 제자 중[4] 하나였다.
1954년 8월부터 1985년 2월까지는 연세대학교철학과 교수(1985년 2월 이후 동교동과 명예교수·1988년 8월 당시 동교명예철학박사 취득)로 교단(대학 강단)에서 후학을 비롯한 각자각자의 애제자(愛弟子)들을 길렀다. 수많은 중도적 성향이 짙은 개신교 색채의 철학적인 수필을 발표하여 뭇 독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특히 1959년 7월 6일 (1959-07-06) 당시에 간행한,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수필집으로는 《영원과 사랑의 대화》, 《오늘을 사는 지혜》, 《현대인과 그 과제》 등이 있다. 저서인 《예수》도 그 본인(김형석 교수)의 기독교 사상을 평이한 문체로 설명하는 수필이다.
규칙적인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 그리고 절제와 노력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이런 삶의 철학으로 살아왔다.
큰아들 또한 철학자인 한림대학교 명예교수 김성진(철학박사 출신)이며 둘째 아들(김성우)도 대학 교수 및 공학박사 출신이다. 슬하 2남 4녀(6남매)는 모두 결혼 및 성가(또는 기혼 및 출가)하였으며 특히 결혼 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딸은 3명(둘째딸, 셋째딸, 막내딸, 이렇게 셋.)이다. 큰 친손녀(큰 아들 김성진 교수 부부의 큰딸)도 미국에서 대학 교수라고 한다.
아무리 자신보다 어리다고 해서 낮춤말로써 함부로 대함이 없는 인격을 가졌다는 존경을 받고 있다.
사상 및 철학
“
종교가 만약에 교리가 되면 오히려 인간이 구속된다. 종교는 진리로 내 안에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