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발해사(遣渤海使)는 율령국가 일본이 발해(渤海)에 파견했던 사절로 728년부터 811년까지 모두 14회(13회 또는 15회 설도 있다. 후술)[1] 파견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의 사서인 《속일본기》(続日本紀)에 따르면 발해 무왕(武王) 인안(仁安) 2년에 해당하는 일본 요로(養老) 4년(720년) 와타리시마쓰가루쓰노 쓰카사(渡嶋津軽津司)[2] 모로노키미 구라오(諸君鞍男) 등 6인을 풍속 시찰을 위해 말갈(靺鞨)의 땅에 파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갈국에 대해서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를 비롯해 미즈모토 히로노리(水本浩典), 구마타 료스케(熊田亮介),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 등의 사학자들이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북부의 아시와세(粛慎)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으나,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 사카요리 마사시(酒寄雅志) · 모리타 데이(森田悌), 세키구치 아키라(関口明) 등이 발해를 가리킨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정설은 없다. 후자에 의하면 요로 4년(720년)에 일본에서 모로노키미 구라오를 사신으로 보낸 것을 계기로 발해에서 고제덕을 대사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보낸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698년 고왕(高王)에 의해 세워진 발해(당시에는 진국)는 무왕의 시대 당(唐)이나 신라와의 외교적 대립을 겪게 되었고, 이들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으로의 사절 파견을 계획하였다. 이는 군사동맹으로써의 색채가 강한 사절이었다. 또한 일본측도 발해가 자국 천황의 덕화(徳化)를 사모하여 내조(来朝)하였다는 인식과 더불어, 발해를 그 전신이 된 고구려의 부활이라 인식하고 사절을 특별히 예우하고 이듬해 서둘러 견발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제1회 견발해사는 이때에 보낸 사신을 가리킨다.
신라와의 관계가 긴장상태에 있었던 기간(758년-763년)에는 거의 매년 사신이 오고 갔는데, 발해 문왕(文王) 대흥(大興) 23년/덴표호지(天平宝字) 3년(759년)에는 일본의 에미노 오시카쓰(恵美押勝)가 (발해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군선(軍船) 394척, 병사 4만 700인을 동원하는 본격적인 신라정토계획(新羅遠征計画)을 세웠다. 이 원정은 훗날 고켄 상황(孝謙上皇)과 오시카쓰 사이의 불화나 발해측의 사정 변화 등으로 인해 중지되었으나 문왕이 당과의 융화를 도모하는 시대가 되면서 군사적 의미도 더불어 약해지고 전적으로 문화 교류나 경제활동만을 중심으로 하는 사절로 그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이 교류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발해로부터 오는 물품들에 대해 일본 조정측에서 몇 배의 회사(回賜)로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발해측이 막대한 이익을 챙긴 반면 일본측은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3] 때문에 사절에게 제공하는 접대나 회사에 들어 가는 경비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불어나자 일본 조정에서 발해로 보내는 견발해사는 중단되었고 발해에서 오는 사신도 12년에 한 번씩만 올 것과 오는 장소도 다자이후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발해측에서의 사절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헌인 《엔기시키》(延喜式)의 대장성식(大蔵省式)에 의하면 일본에서 보내는 견발해사 일행은 대사(大使), 판관(判官), 녹사(録事), 역어(訳語), 주신(主神), 의사(医師), 음양사(陰陽師), 사생(史生), 선사(船師), 사수(射手), 복부(卜部), 잡사(雑使), 선공(船工), 이사(柂師), 겸인(傔人), 협초(挟杪), 수수(水手)로 구성되어 있었다.
14회가 아닌 13회로 보는 설의 경우 제4회 견발해사를 제외하였고, 15회로 보는 경우에는 786년(또는 720년)을 포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