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鄕歌, 문화어: 사뇌가)는 신라 때에 불리던 민간 노래로서 보통 향찰로 기록되었다. 보통 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까지의 것을 말한다. 승려, 화랑을 포함한 다양한 작자층에 의해 불교적 기원, 정치적 이념, 민요 또는 주술적 성격이 내용을 담은 작품들.
형태 및 표기
향가의 구조적 형태는 4구체, 8구체, 10구체로 나뉘며, 한자로 지은 노래도 있고, 이두로 지어진 노래도 있다. 삼국시대 때는 4구체 향가가 많았으나, 남북국 시대 전기와 고려 초기로 가면서 8구체와 10구체 향가들이 다양하게 지어졌다.
다양한 내용이 있으며, 노동요나 민요로 추측되는 풍요, 귀신이나 액운을 막기 위한 주요(呪謠)로 부르기도 하며, 또는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싶어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모두 한자를 빌어서 한국어를 표기한 것으로 이두(吏讀)와는 달리, 각 수의 가사 전체를 한자로 기록하였기에, 순수하고도 고유한 고대 한국어인 것이 주목할 만하다.
미루어 보아, 당시 중국을 당(唐)이라 한 데 대해 신라를 향(鄕)이라 일컬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로써 생각할 때 중국의 사장(詞章)에 대해 신라의 노래를 향가라 하였을 것이다.
향가의 풀이
일찍이 이 노래의 부분적인 어학적 주석은 일본인들이 시도하다가 25수 전반에 걸친 주해는 오구라 신페이가 처음으로 이루었다. 그 뒤로 양주동이 더 나은 해독을 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지헌영(池憲英)을 비롯한 이탁(李鐸), 김준영(金俊榮), 이숭녕(李崇寧), 김동욱(金東旭), 김선기, 서재극, 홍기문, 정렬모, 김완진 등이 계속 연구·발표하고 있다.
오늘날 전하는 향가
삼국시대에 수많은 향가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로, 도합 25수 뿐이며, 이 중 《균여전》에 수록된 향가는 고려 초기의 균여대사의 작품으로 10구체의 불교 예찬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불교에 관련된 설화를 수집하고 기록한 여러 편에 실려 있다.
문무왕 때 또는 효소왕 때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광덕(廣德)의 처가 지은 10구체 향가라고 하는데, 광덕이 죽자 그의 친구 엄장(嚴莊)이 그 처에게 동침을 요구하자 이를 거절했다는 설화만 전해 온다. 노래의 원문에 “願往生”이란 말이 겹쳐서 나와서 불교에서는 이를 “극락에 가고 싶다”라는 말로 풀이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극락노래”라고 한다. “일찍이 노래가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며 명확한 제목은 전하지 않는다.
신라효소왕 때에 만들어진 8구체 향가로서, 화랑가이다. 화랑 죽지랑의 낭도였던 득오곡(得烏谷, 또는 득오랑)이, 그의 스승 죽지랑을 사모하고 찬양하여 지은 8구체 향가로서, 노래의 주인공은 화랑 죽지랑이므로 노래의 이름이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이며, 일명 득오곡모랑가(得烏谷慕郞歌)라고도 부른다.
죽지랑은 김유신(金庾信)의 부원수로서 삼국 통일에 공이 컸다. 득오곡은 그의 낭도로서 풍류와 도술로 이름이 높았다. 노래는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미요
백성은 어린아이라고 하실 때
백성이 사랑을 알 것이로다
구물거리며 살던 백성
이를 먹어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를 가겠느냐' 할 때
나라가 유지될 줄 알 것이로다
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 때
나라가 태평할 것이니라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신라경덕왕 때 승려월명사가 지은 것으로, 《삼국유사》 권5 “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재를 올리고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제천의 〈월명〉(月明)은 〈제망매가〉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품으로, 나뭇잎을 통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을 노래하고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1]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란 인물이 지었다고 하며 역신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동침하고 같이 잠자리에 있는 것을 돌아와서 보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러자 역신은 처용이 노하지 않은 것에 감동하여 그 앞에 나타나 꿇어앉았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역신을 쫓았다고 한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초 균여대사(923~973)가 지은 11수의 10구체 향가다. 균여대사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의 보현보살 열 가지 행원에다 낱낱이 향가 한 수씩을 짓고, 11장은 그 결론으로 된 사뇌가이다. 고려 제4대 고려 광종 연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은 해인사 장경판으로 전하는 《균여전》에 향찰로 기록되어 있다
현존하는 화랑세기 필사본 중 6세 세종 장에 미실이 사다함이 출정할 때 지었다는 풍랑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 필사본은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위작으로 취급하는 견해가 우세하여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고려예종이 지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향가로 보는 이도 있다. 그 밖에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공사부지에서 발견된 목간에 기록된 내용을 향가로 보는 논문이 출간된 바 있다. 이 향가로 추정되는 글에는 '만신가'(万身歌)라는 이름이 붙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