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가가 창설한 세르비아 자유군단은 코차 안젤코비치를 주사령관으로 삼았으며 1791년 2월부터 9월 7일까지 산자크 지역 중앙부를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이 분쟁에 개입하면서 세르비아 자유부대의 영토가 확대되자, 합스부르크가는 이들 영토를 '세르비아'(독일어: Serbien)라는 군정 보호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1791년 시스토바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군이 철수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되돌아갔다.
배경
세르비아인들은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세력으로 나섰으며 각 지역의 봉기를 주도해 나갔다.[1]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 측은 세르비아인들을 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세르비아 지역이 황폐화되어,[1] 세르비아의 피난민들이 합스부르크가 영토로 건너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1]
1786년 캅카스 지역 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듬해 합스부르크가의 요제프 2세와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크림 반도에서 2차 회담을 열었고, 오스만 제국은 이를 명분 삼아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2] 그 사이 오스트리아군은 세르비아계 난민들에게 전쟁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1786년 바나트에서 병력 5,000명 규모의 세르비아 자유군단이 창설되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분란을 피해 건너왔던 난민들로 구성되었다.[3] 세르비아 자유부대는 합스부르크가의 통치 하에서 세르비아의 해방과 통일을 위해 싸울 의지를 갖고 있었다.[3] 주사령관은 오스트리아 소령 미하일로 미할례비치였으며[2] 이 밖에 자원한 사람으로는 알렉사 네나도비치, 스탄코 아람바시치, 라디치 페트로비치와 조르제 페트로비치, 코차 안젤코비치가 있었다.[2] 오스트리아측은 세르비아 자유군단로 하여금 베오그라드 점령을 위해 나섰으나 1787년 말과 1788년 초 두 차례에 걸친 공격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3]
결국 1788년 2월 오스트리아군이 직접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이 시점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친 형세가 되어버렸다.[3] 러시아군의 더딘 동원으로 오스만 제국의 병력이 베오그라드로 집중 투입되었기 때문이다.[4] 오스트리아군은 몰다비아의 러시아 지원군에 의존하였으며 1788년 후반기가 되어서야 공세에 나섰는데 이에 대해선 요제프 2세 본인이 오스만과의 전투를 꺼렸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4] 그해 7월 오스만군은 다뉴브강을 건너 오스트리아령 바나트를 침공해 왔다.[4] 양측 모두 보급 부족에 시달렸고 여기에 오스트리아군은 병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유행하는 바람에 타격을 입었다.[4] 약 5만 명의 세르비아 난민이 다뉴브강을 건너면서 오스트리아군의 보급물자 유통 문제를 일으켰던 것이다.[4] 8월 중순에 이르러 요제프 2세는 20,400명의 병력을 바나트로 파견했다.[4]
1789년 10월 8일, 에른스트 기데온 폰 라우돈 장군이 베오그라드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세르비아 일대의 점령에 나섰고, 세르비아인들은 군사훈련과 기술을 숙달하며 합스부르크 자유군단하에서 맞서 싸웠다.[5]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점령작전의 배후에는 정교회가 다수인 세르비아인들을 개종시키려는 가톨릭 교회가 있었다. 이 때문에 1791년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영토를 탈환해 나가자 세르비아인들이 러시아 제국에 도움을 청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5] 그러나 결국 1791년 오스트리아군은 다뉴브강과 사바강을 건너 철수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으며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박해를 두려워한 세르비아 난민 수천 명도 합류하였다. 이후 시스토바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끝이 났다.
여파
전쟁이 끝난 뒤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지방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회유 정책을 펼쳤다.[6] 오스만군의 조직개편으로 부대에서 이탈하게 된 예니체리들은 세르비아로 피난하여 스메데레보의 산야크라는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그곳에서 세르비아인들에게 부여된 권리를 앗아가고자 하였다.[6]
이른바 다히예 (dahije)라 불리는 이들 세력은 세르비아 지역유지를 150명이나 살해하였고 분노한 세르비아인들은 1804년 제1차 세르비아 봉기를 일으킨다.[6] 봉기의 주동자는 합스부르크가 점령기에 오스트리아군 지원병으로 복무했던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였다.[6] 세르비아 봉기는 이후 세르비아 혁명으로 확대되어 세르비아의 실질적 독립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세르비아야고디나와 클라도보 마을에서는 이 시기의 반란을 기리기 위하여 '코차의 변경지대를 위한 기념일' (Дани Кочине крајине)을 제정하여 관련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