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철종 12년), 랑드르·요안노 등과 함께 조선에 들어왔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11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함께 전도에 힘썼다. 그 결과 1865년(고종 2년)에는 천주교 신도수가 무려 2만 3000명에 달하였다.
1866년의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선교사 3명 중 하나였던 리델[1]은 1866년 5월 8일 조선으로부터의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는 7월 6일 청의 주푸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리델이 도착했을 때 프랑스 극동함대(極東艦隊)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 제독은 톈진에 있었다. 리델은 톈진으로 직행하여 조선에서 발생한 프랑스 신부들의 처형소식을 전하고 생존해 있는 다른 신부 두 명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 함대를 출항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로즈 제독은 인도차이나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주력함대가 돌아오는 대로 조선 원정을 단행할 것을 약속했다.[2]
저술 활동
이후 리델은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한국어 사전으로 불리는 <한불자전>, <한불문전>을 편찬하는 데 힘썼다.
한불자전(Les missionnaires de Corée (1881). 《Grammaire coréenne》. Yokohama: L. Lévy et S. Salabelle.) : 한국어 표제어와 프랑스어 해석을 같이 쓴 이중어사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