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르 공작 카미유 도스튄 드 라 보메(Camille d'Hostun de la Baume, duc de Tallard; 1652년2월 14일 - 1728년3월 20일)는 프랑스 귀족이자 외교관이며 군사 사령관이다.
탈라르는 15살의 나이에 프랑스 군대를 위임받는 것을 승인받았다.[1] 그는 네덜란드에서 콩데 공작(prince de Condé) 휘하에서 이후 근무하였고, 1674년부터는 알자스에서 튀렌의 지휘하에 있었다. 그는 1678년 육군 소장(maréchal de camp)에 임명되었고, 9년 전쟁(1688-1697)에 종군하였다.
그는 루이 14세와의 우정으로 인해 권력과 위치를 안정받았다. 이후 전쟁에서 2년 동안 그는 성 제임스 궁정(Court of St. James's; 영국 궁전을 명칭)의 대사(ambassador)로써 유럽 정치상의 사건에서 그의 특별한 학식은 높은 가치가 있음을 입증하였다.[2] 1701년 9월 국왕 제임스 2세가 죽자 루이 왕은 제임스의 아들을 잉글랜드의 왕좌를 계승할 계승자로 인정하였다. 그결과 윌리엄 3세는 1702년 런던에서 탈라르를 내쫓았다.[1]
탈라르의 군사 경력을 쌓기 시작한 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높아졌다. 1703년 9월 7일 부르고뉴 공작(duc de Burgundy)과 탈라르는 브라이자흐(Breisach) 도시를 점령했다. 10월 중순 탈라르는 란다우를 차지하기 위해 전진했다.[3] 11월 15일 슈파이어바흐 전투(Battle of Speyerbach)에서 탈라르 군대는 헤센-카젤 공(Prince of Hesse-Kassel 혹은 Hesse-Cassel)의 지휘하의 구원군을 신속하게 격파했다.[4] 그 결과 란다우는 이틀 뒤에 함락되었다. 곧 얼마안가 탈라르는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1]
탈라르는 연합한 프랑스-바이에른 군대의 전체 지휘관의 위치에 있었으나 그러나 이어서 1704년8월 13일에 벌어진 블렌하임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완전히 파괴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결정적 패배로 인해 그는 포로로 붙잡혀 잉글랜드에 있는 노팅엄에 수감되었다.[1]
1711년 그는 풀려나 프랑스로 돌아왔다.[6] 블렌하임의 참사에도 불구하고, 루이는 원수를 맞이하여 위로했다.[1] 탈라르는 1712년 공작이 되었고, 1715년 프랑스 귀족(Peer of France)이 되었다. 루이 14세 유언에 따라 탈라르는 섭정 평의회(Council of Regency)에 임명되었으나 그러나 오를레앙 공작은 이 유언을 파기했다. 그는 1724년 아카데미 드 사이언스(Académie des Sciences)의 학장으로 선출되었고, 1726년 프랑스 국가의 장관이 되었다. 그는 1728년에 죽었다.
각주
↑ 가나다라마Falkner: Blenheim 1704: Marlborough's Greatest Victory, p. 104
↑Churchill: Marlborough: His Life and Times, p. 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