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창립된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전신)는 1928년 조선심판협회, 1933년 조선축구협회(현 대한축구협회의 전신)가 창립되기 전까지 축구 전반에 관한 문제를 통할한 가장 권위 있는 기관이었다. 한편 각 지역별로 체육협회가 생겼는데, 그 중 1925년 평양에 설립된 관서체육회는 조선체육회와 더불어 가장 활발하고 광범위한 활동을 한 단체였다.
축구대회
컵대회
성인 클럽은 물론 소학부, 중등부, 전문부, 실업부 등이 같이 참가하여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졌던 대회들이다. 대표적으로 전조선축구대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전조선축구대회 (관서체육회)가 있다. 전조선축구대회는 해방 후 전국축구선수권대회를 거쳐 현재의 FA컵으로 이어졌으며,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는 해방 후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로 이어진다. 전조선축구대회 중 1934~1937년 대회는 전조선종합경기대회(현 전국체육대회의 전신) 종목의 일부로서 치러졌다. 이외에도 재조선일본인들의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서 주최하는 조선신궁대회 및 기타 일본 본토에서 열리는 대회들이 있어 조선의 팀들도 일부 참가하였다.
도시 연고 팀 단위로 참여하여 치러졌던 대회들이다. 경평전이 대표적이며, 리그전 방식으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경평전의 경우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가며 열렸으며, 3지방대항축구전의 경우 서울, 평양, 함흥 등 참가 도시를 순회하며 열리기도 하는 등 지역 연고 개념이 강한 대회였다.
20세기 초반부터 서울과 평양 두 도시를 중심으로 직장을 단위로 한 실업팀들이 등장하며, 전국 단위 대회에 참가하기도 한다. 1930년 평양에서 열린 제6회 전조선축구대회(관서체육회 주최)에서부터는 실업부가 창설되어 평양 일대의 실업팀들이 참가하게 되었으며, 1942년 마지막 대회에서는 경평대항실업축구전이라는 부문이 따로 만들어져 평양과 서울의 실업팀 연합이 2경기를 치른다.[1]
한편 1939년에는 서울 일대의 실업축구계 인사들이 모여 경성실업축구연맹을 만들고 제1회 실업축구리그를 개최한다[2][3]. 비록 이 리그는 1회를 끝으로 중단되지만, 1949년 다시 실업축구연맹전이 재개되며, 경성실업축구연맹은 이후 서울시실업축구연맹과 한국실업축구연맹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