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추존 군주 환조의 아들인 완풍대군(完豊大君)의 18대손이며 함경남도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발영동에서 부친 병관(秉瓘)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해서는 고향 북청 학원을 설립, 교육 사업에 종사하다가, 상경하여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가 되었다. 이준은 황족 이재규가 친일 내각과 협잡하여 논밭 문서를 위조하고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자 징역 10년을 구형하였으며, 은사령 작성은 국법상 검사 고유 권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부가 은사 대상자 명단을 정해놓고 그대로 작성할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상관인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하였다. 법부는 부하가 상관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이준을 체포했으나, 애국계몽단체 회원들과 백성들이 석방을 요구함에 따라 3일만에 석방되었다. 이준은 석방 직후 법무 대신과 평리원 재판장 이하 관리들 모두의 면직과 처벌을 청원하며 나라의 현장을 바로잡고 국민의 분원을 풀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준은 법률가 임명 33일 만에 면관되었다.[1]
개화파 활동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하였으며, 갑오경장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귀국후에는 독립협회와 지금 서울특별시중앙우체국 앞에 있는 감리교회인 상동교회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당시 상동교회는 당시 전도사였던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개화파 청년들이 많이 모여든 장소였고, 전덕기 목사의 부탁을 받은 국어학자주시경 선생이 상동교회에서 만든 학교에서 우리말 문법을 가르칠 정도로 민족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공동체였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공진회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07년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국차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 용정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순국했다.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특사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 《헤트·화데란트》, 1907년 7월 15일자 기사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결을 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한민족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결설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3]:241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사 결과,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결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3][4]:[5] 물론 이준이 할복이 아닌 병사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민족의 앞날을 걱정한 이준의 민족의식이 빛바래는 것은 아니다. 1962년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과 이준열사기념교회(감리교)가 건립되어 있다.
사위 류자후는 1945년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 달 간 돈암장에서 이승만 내외를 보필하였다.[11] 그러나 관상을 볼 줄 알던 류자후는 이승만의 관상이 좋지 않다[11] 며, 이승만의 비서들이 11월부터 귀국하거나 돈암장을 찾아오자 서서히 그들에게 일을 넘기고 이승만의 곁에서 물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