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백영(劉伯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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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당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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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수주도독 → 계주도독 → 좌효위장군 → 좌감문위대장군, 기주도독장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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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장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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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활동 | 백제의 멸망, 여당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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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하박현공 → 산양군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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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상주국, 구군대장군(훈관과 무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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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백영(劉伯英, ? ~ ?)은 중국 당나라 초의 무장이다. 주로 영남 지방과 한반도 전선에서 활약하였다.
생애
정관 연간에 수주도독(巂州都督)으로 있으면서 건의하기를, ‘송외(松外)의 남만인들은 대개 잠시 붙었다 곧 돌아서니 그들을 치기를 청합니다. 서이하(西洱河)에서 천축으로 가는 길이 뚫릴 것입니다.’라 하였다. 수년 후인 648년[1]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양건방(梁建方)이 송외만을 정벌하였다.[2] 651년(영휘 2년) 계주도독(桂州―)으로서 침탈해온 두주(竇州)와 의주(義州)의 만인을 물리쳤다.[3]
660년(현경 5년)에는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으로 있었다. 좌무위대장군(左武衛―) 소정방이 신구우이마한웅진(神丘嵎夷馬韓熊津) 등 14도대총관[4]이 되어 백제를 멸할 때 풍사귀(馮士貴), 방효태(방효공) 등과 함께 따랐다.[5] 당시 훈관과 무산관은 상주국(上柱國), 구군대장군(冠軍大將軍)이었으며 작위는 하박현공(下博縣公)이었다.[6] 이어서 제2차 여당전쟁에도 참여했는데 당초 평양도행군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을 맡았다가[7] 661년(용삭 원년) 편제가 바뀌어 그 직책은 소정방에게 돌아갔다.[8] 황해를 건너 평양까지 포위했지만 662년 전황이 어려워져 철수하였다.[9] 663년 기주도독장사(冀州都督長史)의 자리에서 영남병을 이끌고 유주(柳州)의 만인들을 토벌하였다.[10]
관직은 좌감문위대장군(左監門衛―)에, 작위는 산양군공(山陽郡公)에 이르렀다.[11] 죽어서 초주(楚州) 우이현(盱眙縣)에 묻혔는데 천수 연간에 내자순(來子珣)의 무고로 인해 아들 유행실(劉行實), 유행유(劉行瑜), 유행위(劉行威), 손자 유건통(劉虔通)이 사형당하고 유백영의 관은 훼손되었다.[12]
가계
각주
- ↑ 《구당서》3권 본기 제3 태종下 정관 22년
- ↑ 《신당서》222권下 열전 제147下 남만下 양찬만(兩爨蠻)
- ↑ 《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영휘 2년
- ↑ 〈대당평백제국비〉 《신당서》본기, 소정방전, 백제전, 《자치통감》은 대표로 신구도라 하였고 《구당서》소정방전은 웅진도라 하였다.
- ↑ 《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백제
- ↑ 〈대당평백제국비〉
- ↑ 《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현경 5년
- ↑ 《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용삭 원년
- ↑ 《신당서》220권 열전 제145 동이 고려
- ↑ 《신당서》3권 본기 제3 고종 용삭 3년
- ↑ 〈책유백영좌감문위대장군문〉(冊劉伯英左監門衛大將軍文) ; 《당대조령집》(唐大詔令集) 62권
- ↑ 《구당서》186권上 열전 제136上 혹리(酷吏)上 내자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