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1902년 ~ 1904년) 탐험은 런던 유학 중이었던 오타니 고즈이 본인이 직접 나섰고, 혼다 에류(本多恵隆), 이노우에 고엔(井上弘円), 와타나베 뎃신(渡辺哲信), 호리 겐유(堀賢雄) 네 명이 동행했다. 고즈이는 카슈가르에 체재한 뒤 인도를 향하여 1903년1월 14일에 오랜 기간 미지의 산이었던 영취산을 발견했고,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王舍城)을 특정했다. 와타나베와 호리는 갈라져서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가 호탄, 쿠차 등을 조사했다. 수바시 고성(故城)에서는 사리(舍利) 용기를 발견했다.[1]
별도의 윈난성 루트 탐험이 노무라(野村禮譲), 시게노 준이치(茂野純一)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도중에 건축가 이토 주타와 조우했다. 이것이 고즈이와 이토 간 교류의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쓰키지 혼간지 설계 건조(建造)에까지 이르렀다.
제2차 탐험
제2차(1908년 ~ 1909년) 탐험은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 노무라 에이자부로(野村栄三郎) 둘이 파견되어 외몽골을 통해 타림 분지에 들어가 투르판을 조사한 뒤 코를라에서 둘로 갈라졌다. 노무라는 카슈가르 방면, 다치바나는 로프노르 호적(湖跡)이 있는 누란 방면을 조사했다. 유명한 이백문서(李柏文書)는 이 때 발견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3차 탐험
제3차(1910년 ~ 1914년)는 다치바나 즈이초, 요시카와 쇼이치로(吉川小一郎) 둘이 투르판, 누란 등 이미 조사한 지역을 재차 조사한 것을 시작으로 중가리아에서도 조사를 진행한 한편, 돈황에서 약간의 문서를 수집했다. 이 때 수집한 미라 등은 당시 일본이 조차 중이었던 중국다롄의 뤼순박물관(旅順博物館)에 소장되어 현재도 공개 중이다.
보고 및 현황
세 차례의 탐험에 의해 귀중한 고문서 문화재가 일본 국내에 반입되었는데, 그 보고서로서 《서역고고도보》(일본어: 西域考古図譜) 두 질(1915년), 《신서역기》(일본어: 新西域記) 두 권(1937년)이 간행되었다. 연구 보고서로서 《서역문화연구》(일본어: 西域文化研究) 총 여섯 권(1958년)이 나왔다. 현재는 반입된 문서의 자료집인 《오타니 문서 집성》(일본어: 大谷文書集成) 1 (1984년)도 간행되었다.
탐험대의 수집품은 일본으로 보내진 다음 중국 뤼순박물관, 일본 류코쿠대학, 도쿄국립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등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국립중앙박물관의 오타니 컬렉션 소장품은 원래 오타니 고즈이의 별장 니라쿠소(일본어: 二楽荘)에 보관되었다가 1916년 4월 말에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인계된 것이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