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부터 그는 시오니즘 운동에 강경하게 반대했으며, 1920년 네비 무사 폭동을 주동한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영국 당국에 의해 사면되었다. 1921년 고등판무관 허버트 새뮤얼에 의해 예루살렘 대무프티로 임명된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이슬람을 고취하면서도 시오니즘에 대항하는 비종교적 아랍 민족주의를 규합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1~1936년 동안 아민 알-후세이니는 영국 당국의 주요한 협조자로 여겨졌으며, 영국은 그를 예루살렘 대무프티로 임명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의 지도층 구조와 민족주의 운동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1937년 그는 영국 통치에 대항한 1936~1939년 아랍 봉기에서 지도자 역할을 자처하였고, 이에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레바논을 거쳐 이라크로 도피하였다. 이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과 적대한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접근하여 그들과 협력했고,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의 회동에서 아랍의 독립을 지지하고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족의 고향을 세우는 것을 반대해줄 것을 부탁했다. 2차 대전 종전 이후 그는 프랑스의 보호를 받다가 카이로로 피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