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나파르트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역의 하급 귀족 가문으로 16세기에 코르시카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3] 조상대대로 법조인을 많이 배출한 법률가 가문이다. 카를로 역시 나폴레옹의 아버지도 피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4]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코르시카에서 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샤를 보나파르트는 로마와 피사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아버지가 1763년 사망함에 따라 아작시오부주교이던 작은아버지, 뤼시앵 보나파르트가 17살이었던(당시 법적 성인은 25살부터였다) 그의 후견인이 되었다.
프랑스의 코르시카 점령에 맞서싸운 혁명가 파스콸레 파올리의 원조자였으며, 혁명이 실패하고 코르시카가 병합된 이후 프랑스측으로 전향하였으며 1771년 9월 13일 보나파르트 가문은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귀족에 봉한다는 특허장을 받고 귀족 자격을 얻었다.[5] 코르시카의 귀족 대표인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죽음
1785년 2월 24일에 위암으로 사망했는데 이때 나폴레옹은 파리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던 중이었다. 나폴레옹은 아버지의 사망으로 수입이 끓어져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조기졸업을 통하여 일찍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6] 정규과정 4년인 사관학교를 조기졸업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통상 2년이상을 준비하는데 비해 7개월가량 노력한 끝에 9월에 치루어진 시험에 합격하여 입학한지 11개월만에 포병 소위가 되었다.[7]
후손
샤를 보나파르트는 1764년 6월 1일 마리아 레티치아 라몰리노와의 결혼으로 14명의 자식을 가졌고, 그 중 8명이 요절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Dans les actes anciens qui furent recensés et mis en avant par les Bonaparte pour prouver leur noblesse, le nom de la famille était presque systématiquement Bonaparte, sans u avant le o, ni particule. Il existe néanmoins des variantes : ainsi, sur l'acte de mariage de Charles-Marie Bonaparte, celui est mentionné sous le nom de Carlo de Bonaparte (avec la particule mais sans le u avant le o). Lorsqu'il fut reconnu noble, Charles Bonaparte enregistra son nom et celui de ses enfants avec la particule et le u avant le o, ce qui l'assimilait à la noble et prestigieuse famille florentine de Buonaparte qui les reconnut comme parents.
↑D'après le Dictionnaire Napoléon (sous la direction de Jean Tulard). Cependant, dans ses Mémoires domestiques de la famille Buonaparte, Charles Bonaparte indique que son premier enfant avec Maria Letizia Ramolino, était une fille. Ces mémoires ont été traduites de l'italien et publiées pour la première fois en 2002 dans l'ouvrage de Dorothy Carrington, Portrait de Charles Bonaparte (Cahors, 2002).
↑D'après une lettre du capitaine Ristori à un ami, M. de Pradines, datée du 27 septembre 1779, publiée en partie par Paul Bartel, le Figaro Littéraire du 1er mai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