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4년9월 1일에서 1815년6월 9일까지 열린 이 회의의 목적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상태를 전쟁 전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였다. 즉 프랑스 혁명 이전의 유럽의 왕정 체제를 다시 보수하고 유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유럽의 기존 체제를 위협할 일을 예방하기 위해 프랑스가 다시 강국이 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도 빈 회의의 중요한 목표였다.(그러나 승전 4개국의 분열과 프랑스 외무상 탈레랑의 활약으로 이러한 목표는 잘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반동·보수적 성격을 가진 회의의 결과 만들어진 것이 빈 체제 혹은 유럽 협조 체제(Concert of Europe)였다. 결론적으로 빈 체제는 빈 회의의 결과 만들어진 유럽의 반동적 체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반동이란 역사의 진보를 역행하는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빈 회의에서는 프랑스 혁명으로 몰락한 부르봉 왕가를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복귀시키는 등 왕정이 몰락한 곳에 다시 왕정을 부활시키고,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 열강들은 소위 세력 균형 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빈 체제의 또다른 성격이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빈 체제는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정치의 큰 틀이 된다.
오스트리아는 회의의 주재국으로서 외무상인 메테르니히가 대표하고 있었다. 메테르니히는 회의의 주재자이기도 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입장을 강경하게 대변하였던 것은 차석대표인 베센베르크 남작이었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 사절단의 군사고문으로 라데츠키 등의 보좌관이 있었다.
러시아는 황제인 알렉산드르 1세가 직접 참석하였으며, 형식상으로는 외무상인 네셀로데 백작이 사절단을 대표하였으나, 실제로는 황제 본인이 각종 결정에 직접 참가하고 의견을 정하였다.
프랑스는 패전국으로서 발언권이 높을 수 없었으나, 사절단을 대표한 외무상 탈레랑의 유능함과 승전 4국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책략으로 점차 발언력을 높여 결국 회의의 합의사항 전반에 걸쳐 의견을 개진하고 반영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