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식(朴琮植, 1896년 9월 15일~1950년 9월 10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 만세 운동을 주도한 대종교 관련 계열의 독립운동가로, 호(號)는 말종(茉綜)이다. 사후 2008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훗날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 읍내 지역의 삼월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집회를 주도한 그는, 1896년 9월 15일, 농사를 짓는 집안이던 경상남도 함안 친가에서 박유진(朴庾振)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하여, 1901년(여섯살때)에 이름을 박종식(朴琮植)으로 개명(改名)하였다. 1903년 3월 경남김해사립육영보통학교에 입학하였지만, 1908년 8월 경남함안사립찬명보통학교에 전입학하여 1909년 3월에 경남함안사립찬명보통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같은해(1909년 3월)에 경성보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으며, 1914년 3월에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 보통중등야학과정으로 전입학하였고, 결국 이듬해(1914년)의 3월에 중퇴하였다. 박종식 그는, 1915년 4월에서부터 대종교(大倧敎)를 신자로 입문하여 신봉하면서 이를 차라리 국교로까지 하는 제2의 신대한제국(新大韓帝國)을 건설할 것을 계획하였다.
1915년 12월 당시에 박종식은 만주에 독립운동 기관을 설치하여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모으고, 국내의 청년을 고무 격려하면서, 비밀리에 군사를 훈련시켜 민본주의 군주제 대한제국 황조의 독립을 도모하고, 사회적인 빈곤 사회의 노예의 상태에 빠진 대한제국 동포를 구제하며, 그 자손들을 위해 일신(一新)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이듬해 1916년 5월 경성부(서울)에 거주하는 친일파 부호 민영휘(閔泳徽)한테 독립운동 관련 자금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편지에서 그는 민영휘에게 “차라리 거사에 찬성하고 이에 요구되는 비용의 제공을 제론할 것이요,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토멸대를 통합 조직하고 경성부로 와서 징벌을 가할 것이다. 정안(正眼)과 정재(正財)로써 정의의 사업에 사용하지 않고 천하의 비열한 수준으로 허사스런 사업을 하는 자는 아무리 서로 징벌을 하더라도, 민본주의 국가적인 도리에 반하고 천리(天理)에 역행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민영휘는 편지를 받고 경성종로경찰서장한테 제출하였고, 이로써 사건이 발각되면서 1916년 7월 8일, 경성지법(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공갈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6개월형의 옥고를 치렀으며, 같은해 1916년 11월에 만기출감하였다.
1919년 3월 19일, 박종식은 경남 함안 읍내 지역에서 안갑중·안재성(安在成)·조영규·조동락, 자형 안재형(安在瑩)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 운동 집회에 참여하였다가 이 시위를 지도하던 안지호(安知鎬)가 구금되자 이를 구출하였다. 이후 1920년경 경남 마산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책 송두환(宋斗煥)과 함께 활동하던 중, 1920년 12월 23일 경북경찰부 고등경찰과에 검거되어 두 달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으나 완강한 부인과 묵비로 인해 증거 불충분으로 인하여 1921년 1월 초에 석방되었다.
1923년 6월, 또다시 독립 운동 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924년 1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부산지법(부산지방법원)의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죄 등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31년 1월에 만기출감하였다.
그 후 경남 함안 향리에서 1945년 8월 15일 을유해방·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및 무자광복 등을 모두 목도하였으며, 1950년 6·25 한국 전쟁 당시에는 폐병(폐질환)으로 인해 이미 1년째로 와병타가 1950년 9월 10일, 병사하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2008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