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간(몽골어: ᠮᠢᠨᠭᠭᠠᠨ mingγan) 또는 천호제(千户制)는 몽골 제국의 군사 제도로써 칭기즈 칸 시대에 완성된 군정일치(軍政一致)의 사회 조직 형식을 가리킨다.[1] 한문 음차로 맹안(猛安)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1204년에 칭기즈 칸이 나이만 족을 치기 앞서 그의 부족은 이미 밍간(천호)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십진법에 따라 가까운 곳에 모인 가구 10호를 묶어 아르반(십호), 이 아르반(십호)을 다시 열 개 모아서 자우트(백호), 자우트(백호)를 다시 열 개 모아 밍간(천호)으로 삼았다. 이들은 각기 단위별 지도자가 임명되었는데, 1206년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 칸은 전 몽골을 95개 천호로 개편하고, 88명의 휘하 공신들을 노얀(즉 천호장)으로 임명하였다. 노얀(천호장)은 천호를 다스리며 다시 그 자손에게 노얀(천호장)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천호가 다시 열 곳이 모이면 이를 투먼(만호)라 했다.
몽골 제국이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원(元)이 세워진 뒤에는 투먼(만호)과 밍간(천호)는 다시 상, 중, 하의 3등급으로 나뉘었고, 백호는 2등으로 나뉘었으며, 각기 만호부(万户府), 천호소(千户所), 백호소(百户所)가 세워졌다. 천호소는 배속된 군사의 수에 따라서도 7백 인 이상이면 상(上)천호소, 5백 인에서 7백 인은 중(中)천호소,3백에서 5백 인 정도면 하(下)천호소라 구분했다.[2] 천호소 한 곳마다 다루가치(达鲁花赤) 한 사람을 두었다.
중국 학계에서는 밍간(천호)제의 기원을 선비족(鮮卑族)이 유목 생활을 하던 시절의 군사 제도에서 찾고 있으며, 중국 왕조에 수입되어 수(隋) · 당(唐)의 부병제(府兵制) 및 명(明)의 위소제(衛所制)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있다.
명칭
몽골 제국은 그들이 정복한 각 지역에서 밍간 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유라시아 지역 전역에서 「밍간」은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현지 언어에서 「천」(千, Thousand)이라는 숫자를 가리키는 단어로 「밍간」을 치환하여 불렀는데, 그 가운데서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천호」(千戸), 아라비아 문자 문화권에서는 「하자라」(هزاره/hāzāra)라는 호칭이 침투해 있었다. 한편으로 「밍간」을 그대로 음역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원대(元代) 한문 사료에서 보이는 「명안」(明安)이라는 인명도 실제로는 Mingγan의 음역이다.[3]
예로부터 한문 훈독의 전통이 있었던 일본의 역사학회에서는 밍간(Mingγan)이라는 용어는 한문사료의 기재를 따라 「천호」(千戸) 또는 「천호장」(千戸長)이라는 표기를 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몽골어 사료 ・ 페르시아어 사료의 이용이 확산되고 중국 중심적인 사관에 대해 비판이 이루어짐에 따라 「천호제도」(千戸制度)라는 명칭도 나타나게 되었다. 몽골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스기야마 마사아키(杉山正明)는 「『천호제도』라는 말은 중화식의 『호』(戸) 개념을 전제하고 있으며 『인』(人)을 기초단위로 했던 유목민에게는 적절하지 않고 『천인대제도』(千人隊制度)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4] 이러한 주장에 따라 최근의 일본의 몽골사학 연구에서는 밍간을 「천인대」(千人隊)라고 번역하는 용례가 늘어나고 있다.
역사
연혁
예로부터 몽골 고원의 유목국가들 사이에서는 십진법을 기초로 하는 사회 ・ 군사 단위를 편제해 왔고, 그 기원은 기원전의 흉노(匈奴)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테무친, 훗날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이라 불리게 될 인물이 등장했을 때 몽골에서는 부족(部族)/씨족(氏族)이 숙영할 때 적군이 침입에 대비해 원형의 진을 짰고, 이를 몽골어로 쿠리엔(Kürien)라고 불렀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쿠리엔은 1천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쿠리엔=1천명 부대는 당시의 유목 사회의 기본적인 구성단위로 보인다.[5]
12세기 말에 몽골부 키야트 씨(氏)의 수장이 된 테무친이 최초로 거느렸던 군대는 키야트 씨에 속한 여러 쿠리엔들이었다. 『몽골비사』에서 「13익」(翼, 13쿠리엔)이라고 칭하고 있는 이들 쿠리엔은 씨족적인 체제에서 결성된 것으로 테무친은 이들 「13익」들에 대해 특별히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며, 심지어 각 퀴리엔(익)의 수장들은 테무친의 출병 요청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한편 「13익」 안에서 제2익(翼)은 테무친 직속이었고, 테무친의 여러 아들과 형제, 너커르(동지), 케식(친위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무친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지 않은 키야트 씨의 여러 퀴리엔들을 의지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자신에 직속된 부대(즉 제2익)을 확대시킨다는 방침을 취했다. 때문에 「13익」의 대부분은 테무친이 몽골 고원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킬 체제가 자연소멸하고, 제2익으로 케식을 맡고 있던 자들이 천인대를 이끄는 장군이 되어, 훗날 몽골 제국의 간부층이 된다.[6]
1203년, 테무친은 아직 몽골에 복속되지 않은 마지막 유력 부족인 나이만 부를 치면서 「숫자를 숫자로 보태고, 1천을 1천으로 해서, 천호(千戸)의 관인, 백호(百戸)의 관인, 십호(十戸)의 관인을 그에 임명한다」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군세를 재편성해 천인대로 구분하고 각각 천인대장(千人隊長) ・ 백인대장(百人隊長) ・ 십인대장(十人隊長)을 지명하였다. 재편성된 천인대는 재래의 씨족적 원리가 아닌 테무친이 정한 제도에 따라 행동했고, 천인대장도 기존의 씨족장이 아니라 테무친의 너커르나 케식이었던 자들로 임명되었다.
1206년, 몽골 고원의 통일을 완수한 테무친은 칭기즈 칸이라 불리며 몽골 제국을 세웠고, 국가 체제의 제정에 착수했다. 대칸 즉위 직후에 칭기즈 칸은 재차 몽골 고원 통일에 공적을 세웠던 자신의 공신들을 「천인대장」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그들에게 1천 명의 유목 집단과 유목지를 분봉한다. 이때 제정된 천인대는 95개였고, 칭기즈 칸은 그 가운데 12개의 천인대를 자신의 아들들(주치 ・ 챠가타이 ・ 우구데이)에게 분봉해 제국의 우익부로 삼고, 또 다시 12개의 천인대를 자신의 동생들(카사르 ・ 카치운 ・ 옷치긴)에게 분봉해 제국의 좌익부를 삼았다.
또한 칭기즈 칸은 자신의 휘하에 남은 「중군」(中軍) 또한 우익(서방) ・ 좌익(동방)으로 나누어 서방의 「오른편의 알타이 산에 거하는 만인대(万人隊)」의 만인대장을 보오르추로 임명하고, 동방의 「왼편의 카라운 지둔에 기댄 만인대」의 만인대장을 무칼리로 임명해, 좌우 양익을 각기 통괄하였다. 이와 같이 칭기즈 칸이 정한 국가 구조는 몽골 제국의 기본 형태가 되었고, 이후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도 천인대를 핵으로 하는 「좌익 ・ 우익 ・ 중군」의 삼극(三極) 구조는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7]
칭기즈 칸 사후의 변화
칭기즈 칸의 대칸 등극(1206년) 때에 95개였던 천인대는 각지의 정복전쟁을 거치면서 증대되어 칭기즈 칸의 사망(1227년) 때에는 129개를 헤아렸다. 이 가운데 칭기즈 칸의 여러 자제들의 상속분(28개 천인대)을 제외하고 칭기즈 칸에 직속된 101개 천인대는 말자상속(末子相續) 즉 막내아들에게 상속된다는 풍습에 따라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툴루이가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 사후 그의 셋째 아들 우구데이가 대칸으로 즉위하고, 툴루이가 대칸이자 형인 우구데이조차 아득히 뛰어넘는 군단(=천인대)를 소유하고 있는 점이 문제시되기에 이른다.
우구데이 칸이 금(金)을 정복한 뒤에 정복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툴루이 울루스가 소유하고 있던 천인대에 대한 두 가지 변경이 이루어졌다.[8] 하나는 툴루이 가문에 속한 천인대를 우구데이 가문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대칸 즉위에 즈음해 우구데이는 툴루이와 관계가 깊은 「칭기즈 칸의 케식(친위대)」를 넘겨받는 대신 101개 천인대 가운데서 새롭게 1만 명의 케식을 편제하였다. 우구데이는 또한 툴루이 가문 속에서 네 개의 천인대를 뽑아 자신의 아들 쿠덴에게 주어 새로 쿠덴 울루스를 형성하게 하였다. 이때 칭기즈 칸 이래의 중신이 「칭기즈 칸께서 정하신 소속은 그것이 대칸이라 하더라도 바꿀 수 없다」며 항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9] 다른 하나의 변경은 툴루이 가문에 속한 천인대 가운데 비교적 유력한 유목집단을 독립시켜 울루스를 세우는 것을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병신년(1236년)에 행한 정복지 화북(華北)의 영토 ・ 백성의 분배는 독립한 울루스의 통치자(주로 몽골의 종실제왕)들이 그 대상이 되었는데, 거기에는 툴루이가 원래 이어받았을 천인대 대장의 이름도 올라있다. 또한 이때 독립한 천인대는 우익(서방)보다는 좌익(동방)에 속한 자들이 많았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유력한 다섯 천인대=부족을「왼손의 5투하(投下)」라고 불렀다. 우익보다도 좌익 쪽이 보다 독립성이 높았던 것은 칭기즈 칸이 중앙아시아 원정에 종사했을 때 우익의 천인대가 칭기즈 칸의 지휘 아래 있었던 것에 비해 좌익의 천인대 일부는 칭기즈 칸의 부하였던 무칼리 국왕의 지배하에 금 공략에 참가했고, 자유로운 행동을 취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추측되고 있다.[10]
결국 툴루이가 이어받은 101개의 천인대(=10만 1천 명) 가운데 1만 명이 우구데이의 케식이 되었고, 4천이 우구데이의 아들 쿠덴의 울루스에 속하게 되었고, 6만 6천 명은 독립된 울루스를 형성해, 툴루이 울루스에는 21개의 천인대(2만 1천 명)만이 남게 되었고, 툴루이 울루스는 예전에 비해 독립된 좌익이 소멸되고 우익에 편중된 구성을 이루게 된다. 좌익 천인대의 독립화와 우익 천인대의 툴루이 울루스로의 종속화는 그 뒤로도 지속되었고, 이후의 몽골 제국의 정국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11]
몽골 제국의 내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한 뒤, 몽골 제국은 대칸 계승전이 더욱 격화되는 가운데 천인대장 사이의 대립도 눈에 띄게 드러난다. 1251년 즉위한 몽케 칸은 자신에게 적대하던 우구데이 가를 지지했던 세력을 탄압했고, 몽골 제국 수립 이래의 유력자들이 상당수 몰락하였다. 이르게이나 젤메와 같은 천인대장이 칭기즈 칸의 공신으로써 저명한 인물이었음에도 그 자손에 대한 기술이 줄어드는 것은 제각기 그들의 후계자가 우구데이 가문을 지지했기에 몽케 칸의 탄압을 받고 몰락해버렸기 때문으로 여겨지고 있다.[12]
몽케 칸 사후,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와의 대칸 계승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툴루이 울루스의 본래 영지를 이어받은 아리크 부케가 우익의 천인대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쿠빌라이는 남송(南宋) 원정 이래로 관계가 있던 좌익의 천인대를 의지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 쿠빌라이가 승리하면서 좌익의 천인대장(특히 5투하)은 쿠빌라이 즉위의 공로자로써 대원(大元) 울루스에서 우대받게 된다.[13] 한편 오이라트부의 쿠두카 베키 가문을 필두로 하는 우익 천인대장은 대칸 계승 전쟁에 패한 몽케 가문, 아리크 부케 가문에 동정적이었고, 시리기의 난 등 쿠빌라이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왕족들을 돕는 등, 우익과 좌익의 천인대의 경우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된다.
쿠빌라이 칸 이후 대원 울루스가 성립되고 정치의 중심은 대도(大都) ・ 상도(上都)를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으로 옮겨졌고, 몽골 고원의 천인대의 동향에 대해서는 기록이 줄어들게 된다. 때문에 원대의 천인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못한 점이 많다.
북원 시대
1368년、남경(南京)에서 개창된 한족의 명(明) 왕조의 공격으로 대원 울루스는 대도를 잃고 장성 이남의 영지를 내버린 채 몽골 고원으로 돌아오게 된다.
몽골 고원으로 돌아온 대원 울루스의 고관(노얀)들이 의지한 것은 몽골 고원에 잔존해 있던 밍간(천인대)였고, 그들의 유목지(nutuq)로 돌아온 노얀들은 다시금 유목영주화된다. 많은 영토를 잃기는 했지만 몽골 울루스는 해체되지 않고 명 왕조의 압박에서도 버틴 것은 천인대 제도가 건재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14]
14세기 말부터 15세기에 걸쳐 몽골에서는 쿠빌라이 가문과 아리크 부케 가문과의 사이에 다시금 대칸 계승 전쟁이 벌어졌고 그러한 내란 속에서 몽골의 사회체제도 변화를 피할 수 없었고, 기존의 밍간(천인대)는 변용되어 오토크(otoq)가 되어 많은 오토크를 내포한 투먼(만인대)이 새로운 유목집단의 기초단위가 된다.
군사제도로써의 밍간
단기간에 광대한 지역을 정복한 몽골 제국의 군사 제도는 주변 국가들의 관심을 끌었고, 몽골 제국을 방문한 여행자 대부분은 이러한 몽골군의 군사제도에 대한 언급을 남겼다.
조공(趙珙, 남송) 『몽달비록』(蒙韃備録, 1221)
……(몽골인은) 병사를 수십만을 동원할 때에조차 거의 문서를 쓰지 않고 원수부터 천호(천인대장), 백호(백인대장), 패자두(牌子頭, 십인대장)까지 명령이 전해져 실행된다.
요하네스 데 플라노 카르피니(Iohannes de Plano Carpini, 프란시스코회 수사) 『몽골인의 역사』(Historiae Mongalorum, 1240)
...... 군대 편성에 대해서는 칭기즈 칸은 다음과 같이 명했다. 열 명 위에 한 명이 있는데, 이를 우리는 십인대장(아르바투)이라고 부른다. 열 명의 십인대장 위에 한 명이 있는데, 이는 백인대장(자쿠투)이라 명명된다. 열 명의 백인대장 위에 한 명이 있는데, 이는 천인대장(밍가투)이라고 부른다. 열 명의 천인대장 위에 한 명이 있는데, 그 수는 어둠을[15] 뜻한다. 전군에 2명 내지 3명(의 지휘관)을 두지만, 실제로는 1명이 최고 지휘권을 쥔다.
……모든 사람은 열 개의 부대로 나뉘고 열 명 중 한 명이 다른 아홉 명의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그 지휘관 열 명 중 1명에게 1백 명의 지휘관 칭호가 주어지고, 1백 명의 부대 전체가 그 휘하에 놓인다. 천 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행해지고 1만 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도만'의 지휘관이라 불리는 지휘관을 임명한다. 이러한 편제에 따라 긴급시 인원과 물자가 필요할 경우에는 '도만'의 지휘관으로 임명하면 1천 명의 지휘관에게 하명되어 열의 지휘관에게 도달한다.
……그 군대는 다음과 같이 편제되어 있다. 타타르의 군주가 10만 기를 이끌고 싸움에 나서기로 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만사를 준비한다. 10명씩, 100명씩, 1000명씩, 1000명씩, 1000명씩 각각 1명의 지휘관을 두고 그는 (만인대장) 열 명과 협의만 하면 된다. 만인대장도 (천인대장) 열 명과 협의할 뿐이고 천인대장도 (백인대장) 열 명과 협의할 뿐이고, 백인대장 역시 (십인대장) 열 명과 협의할 뿐이다. 이처럼 각자는 상관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10만 명의 영주가, 어느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려고 할 때, 그는 만인대장에게 1천 명의 동원을 명한다. 그리고 만인대장은 천인대장에게 할당분의 동원을 명한다. 이렇게 해서 모두 즉시 해야 할 일을 양해하고 할당분을 동원한다. 그것은, 그들은 세계의 어느 사람들보다, 명령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10만을 tuc, 1만을 toman이라고 하고, 1000명씩, 100명씩, 10명씩으로 편제되어 있다.
이들 기술은 몽골군이 10, 100, 1000, 10000과 같은 십진법 구분에 따라 편제되었으며 각각 십인대장, 백인대장, 천인대장, 만인대장이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지휘관이 여러 직장을 겸하는지에 대해서는 기술이 나뉘는데, 주바이니가 만인대장은 동시에 천인대장, 백인대장, 십인대장도 겸한다고 기술하는 반면, 카르피니는 각 분대장이 전혀 별개의 존재라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 몽골 제국 초기 천인대장이면서 만인대장을 겸한 무칼리, 보오르추처럼 한 지휘관이 복수의 직장을 겸한 예가 보이는 데 반해, 원대에는 그러한 사례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칭기즈 칸이 제시한 원칙은 직장을 겸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복수의 직장을 겸하는 것은 몽골 제국 개창 초기에 볼 수 있었던 특수한 사례라고 추측되고 있다.[16]
천인대 제도는 칭기즈 칸이 정한 또 하나의 제도인 「케식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206년、천인대 제도를 정비한 칭기즈 칸은 동시에 케식텐(친위대) 제도도 재편해서 규모를 늘리고 정원 1만 명으로 하였다. 또한 칭기즈 칸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돌아가며 시위할 자를 천인대장마다 1천 명씩 골라 넣으라.」라며 케식텐의 구성원은 천인대장의 자제로부터 선출하도록 명했다.[17]
대칸의 측근에서 모시는 케식은 대칸의 친위군이자 동시에 의복 ・ 식사 등을 맡아보는 가정기관이기도 했으며, 간부 양성 기관으로써의 일면도 지니고 있었다. 몽골 제국을 책임질 전도유망한 천인대장의 자녀는 케식텐에 입성하여 국가적 서무에 종사하고 장차 고위관료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동시에 칸과의 신뢰관계를 구축하였다.[18] 몽골 제국의 시대에 이름을 남긴 저명한 고관대작 대부분이 그 조상이 칭기즈 칸으로부터 임명된 천인대장을 둔 노얀의 출신이자 젊은 시절 케식으로 성장했고 자라서 케식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다.
또한 『몽골비사』에는 1만 명의 케식이 구성되어 있었다고 했으며 그 가운데 헵테울(Kebte’ul, 숙영宿営)은 라시드웃딘의 『집사』에서 「친위천인대」(hezāre-ye buzurg) 또는 「칭기즈 칸 직속의 천인대」(hazāra-ye khāṣṣ-i Chīnkkīz Khān)라 불리는 군단으로 해당하였다.[19]
칭기즈 칸의 천인대장들
칭기즈 칸 자신이 직접 임명한 최초의 천인대장은 몽골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귀족층이 되었고, 대원(大元) 울루스나 훌라구 울루스에서는 고관들의 대다수가 칭기즈 칸 시대의 천인대장의 자손들이라 칭했다. 때문에 몽골 시대에는 칭기즈 칸 시대의 천인대장을 언급하는 사료가 많이 편찬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원조비사』와 『집사』는 「칭기즈 칸의 천인대장」 일람을 기재하고 있어 천인대장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 기본사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원조비사』와 『집사』의 기술을 비교하면 전자가 88명의 천인대장과 95개의 천인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에 비해 후자는 천인대장과 129명의 천인대에 대해 기술하고, 어느 한쪽 사료에서는 아예 언급도 되지 않는 천인대장이 다수 발견되는 등 양자의 기술은 차이점이 많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원조비사』에 기록된 천인대장은 몽골 제국이 세워졌던 시점(1206년)의 상태를 기술한 것이고 『집사』에 기록된 천인대장은 칭기즈 칸이 사망할 당시(1227년)의 상태를 기술한 것이라는 점이 거론된다. 때문에 1206년 시점에서는 케식의 대장이었다가 후에 천인대장으로 승진한 자(알카이 카사르 등)、1206년 이후에 몽골 제국에 귀순해 천인대장으로 임명된 자(오이라트의 쿠투카 베키 등)에 대해서는 『원조비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20]
또한 『집사』에서는 「3천인을 거느린 잘라이르부의 무칼리 국왕」 등과 같이 복수의 천인대를 소유한 천인대장이 곳곳에 보인다. 이들은 한 사람의 인간이 복수의 천인대를 통솔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상급 천인대장이 다른 하급 천인대장의 임명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집사』에서는 하급 천인대장을 생략하고 상급 천인대장만을 기술한 것으로 『원조비사』에는 나오고 『집사』에는 나오지 않는 인명의 대부분은 생략된 하급 천인대장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예를 들어 『집사』는 우루드(Uru'ud) 부족의 천인대장에 대해 「4천 명을 거느렸다」는 케흐테이(Kehetei) 만을 거론하고 있을 뿐이지만, 『원조비사』에서는 케흐테이의 아버지 주르체데이(J̌ürčedei)와 동생 부지르(Buǰir)까지도 천인대장의 한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다. 본래 주르체데이, 케흐테이, 부지르 전원이 우루드 부의 천인대장이었음에도 『집사』는 1227년 시점에서 상급 천인대장이었던 케흐테이만을 우루드부의 천인대장으로써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21]
마찬가지로 무칼리(3위)의 친족인 토게(10위)는 「무칼리의 3천인대」의 하급 천인대장으로, 알치 쿠레겐(86위)의 친족인 오울 쿠레겐(79위)과 치구 쿠레겐(85위)은 「알치 쿠레겐의 5천인대」의 하급 천인대장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기존에 『몽골비사』의 기술을 토대로 툴루이는 새로 대칸으로 즉위한 우구데이 칸에게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천인대를 모두 양도했고 우구데이 시대에는 딸린 유목지 ・ 유목민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설명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툴루이 가문으로부터 우구데이 가문으로 옮겨진 천인대는 일부이며 우구데이 칸의 시대에도 툴루이 울루스와 그에 소속된 천인대는 존속하였던 것이 밝혀져 있다(村岡1996,63-64頁).
↑이들 중신들의 항의는 툴루이의 과부 소르칵타니 베키에 의해 간언되어 중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사학자 무라오카 히토시(村岡倫)는 후술할 천인대의 독립화에 대해서는 항의를 받아들인 기록이 없는 점을 들어 이 4천인대도 쿠덴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독립된 울루스가 되었다면 중신들의 항의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주장하였다(村岡1996,81頁).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따로 후보가 있었음에도 굳이 쿠빌라이가 연경(燕京) 지방(훗날 대원 울루스의 수도로써 대도大都라 불리게 되는 곳)을 수도로 선택했던 이유로써 자신의 대칸 즉위를 도운 「왼손의 5투하」그리고 동방 3왕가(東方三王家)라는 동방 세력에 편의를 도모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杉山2004,137-139頁).
↑만인대장은 몽골어로 '투메투(tümetü)인데, 카르피니는 이 단어의 어원에 대해 '어둠'을 뜻하는 단어로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장구 《플라노 드 카르피니의 『몽골인의 역사』에 보이는 몽골 인식과 한계 - 몽골인의 관습과 몽골역사에 대한 서술을 중심으로 -》)
↑本田1991,21頁。하지만 혼다는 「이는 너무나 딱 떨어진다는 아쉬움이 있어 좌우 양익군 혹은 제자에게 주어진 군 천호장의 소속 · 경력이 낱낱이 간명하게 밝혀지지 않으면 확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도 지적하였다. 실제로 「사구」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며 결코 하급 천인대장은 아니었던 제베가 『집사』의 「천인대장 일람」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는(그러나 베스투 부족사에는 「천인대장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등 검토를 요하는 과제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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