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쇼와 5년) 짓센 여학교 재학 당시 간토 대지진에 대한 원조 답례로 지지신보(時事新報)가 기획한 미국 파견 답례사의 한 사람으로 약 1개월 동안 도미하였다.
1931년(쇼와 6년) 이건과 혼인하기 위하여 외가의 친족인 히로하시 백작가 제2대 당주 히로하시 다다미쓰(廣橋真光)의 의붓여동생이 되어 히로하시 세이코로 개명하였다. 요시코의 외조부 나베시마 나오히로의 후처 에이코(榮子)가 히로하시 가문 출신이었다. 1931년(쇼와 6년) 10월 5일에 이건과 결혼하였다. 이건과의 사이에서 충(沖), 기(沂), 옥자(沃子) 등 2남 1녀를 낳았다. 이후 황실의 어료 목장이었던 시부야 조반 마쓰마치의 저택에서 살았다.
1947년(쇼와 22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됨에 따라 일가는 왕공족의 신분과 일본 국적을 상실하여 이건은 모모야마 겐이치, 세이코는 요시코, 장남 충은 다다히사(忠久), 차남 기는 긴야(欣也), 장녀 옥자는 아키코(明子)로 각기 개명하였다. 생활이 곤궁해져 옛 하인이 시작한 단팥죽 가게를 돕거나, 농장을 경영하고 긴자에 과자 가게 ‘모모야마’를 차렸다. 그 후 긴자의 클럽에 고용된 마담이 되었다. 그러나 남편 이건과의 갈등이 커지면서 1951년(쇼와 26년) 5월에 이혼하고 생가 성인 마쓰다이라 요시코로 개명하였다.
2006년(헤이세이 18년) 5월 장남 다다히사가 사망하였을 때 어머니인 요시코가 유산 상속인이 되어 양자의 친자 관계를 증명할 필요가 생겼다. 왕공족은 일반 호적이 아닌 왕공족보에 기재되어 있었고, 그 후 이혼과 자녀의 일본 국적 취득에 따라 호적의 혼란이 생겼다. 이와 같은 수속 중이던 6월 28일에 요시코는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