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고쿠 산지에 깊숙한 위치해 있는 히로시마현 히바 군 도조 정(현재의 쇼바라시)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는 시마네현고쓰시에 있는 고노카와 고등학교(현재의 이와미치스이칸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원래는 투수로서 입단하였지만 연습 경기에서는 홈런을 자주 허용하면서 1개월 후에 감독으로부터 포수로 전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후 다니시게는 “감독이 무서워서 거역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여름에 열린 고시엔 대회에 두 차례나 출전했고 특히 1988년 하계 시마네 현 대회 예선에서 5경기 모두 7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고시엔 대회 8강에 진출하는 기여를 했다. 포수로서는 고교 통산 42개 홈런을 기록하면서 에토 아키라와 함께 ‘동쪽의 에토, 서쪽의 다니시게’라고 불렸다.
1988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1순위로 지명을 받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하여 기대의 의미를 담아 야마시타 다이스케가 달았던 등번호를 1번으로 배정받았다.
다이요·요코하마 시절
1989년 ~ 1992년
고바 다케시 감독으로부터 발탁되는 등 프로 1년차부터 1군에 출전했고 시모노세키 구장에서 열린 시범 경기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대 투수 사이토 마사키로부터 홈런을 때려내는 등 자신만의 타격 스타일을 살려 고졸 신인 포수로서는 1군에서의 개막전 출전을 완수했다. 정규 경기 첫 타석에서 첫 안타를 날리는 등 기대에 부응했지만 80경기에 출전하며 타율 1할 7푼 5리, 3홈런, 10타점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1990년에 스도 유타카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세이부 라이온스로부터 영입한 아키모토 고사쿠와 병용되어 전년도까지 팀의 주전 포수였던 이치카와 가즈마사를 제3의 포수로 쫓아냈다. 그러나 타격면에서도 뚜렷한 성적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1992년에 스도 감독이 팀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에지리 아키라 수석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한 이후 일시적으로 출전 기회가 박탈당하기도 했다.
1993년 ~ 1997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로부터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라는 구단 이름이 바뀐 것을 계기로 등번호를 1번에서 8번으로 변경해 곤도 아키히토가 감독으로, 오야 아키히코가 배터리 코치로 취임, 오야의 지도로 리드를 포함한 수비가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타격면에도 급속도로 향상해 정포수의 자리를 차지했다. 오야 아키히코가 감독으로 승격한 1996년과 1997년에는 2년 연속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한 모리타 고키와 함께 선발 배터리를 짰다(1997년 시즌 개막전은 나고야 돔에서의 첫 공식전).
1998년 ~ 2001년
1998년에는 공수의 요점으로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하는 등 같은 해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구원 투수인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최우수 배터리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개인 최다인 시즌 20개의 홈런을 기록, 그 해의 오프에는 FA의 자격을 얻었다. 당초에는 메이저 리그의 이적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조건 면에서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했다.[3] 이것에 의해 주니치의 주전 포수인 나카무라 다케시가 트레이드를 직소하여 현금 트레이드로 요코하마에 이적했는데 결과적으로 양팀의 주전 포수가 바뀌는 형태가 되었다.
주니치 시절
2003년 ~ 2005년
2003년 시즌 종료 후 오치아이 히로미쓰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주전 포수의 에이스 넘버는 모리 마사히코가 달았던 27번, 혹은 다부치 고이치가 부착했던 22번이라는 오치아이 감독의 지론에 의해 등번호를 27번으로 변경했다. 주전 포수로서 2004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하여 이후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는 만루 홈런을 때려냈다.
2006년
그 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본선 경기인 미국전에서 선발 멤버로 출전해 포수 마스크를 썼다. 이후 정규 경기인 7월 26일의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포수로서는 사상 4번째인 통산 2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타율, 안타 개수, 루타수, 도루 개수는 규정 타석을 채운 선수 중에서 리그 최저를 기록했고 8년 만에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07년
8월 8일의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프로 야구 역대 47번째가 되는 통산 300개의 2루타를 달성했고, 8월 10일 요미우리전에서는 기록 경신중이었던 포수로서의 연속 수비 기회무실책 프로 야구 기록이 1708차례로 멈췄다. 타율, 득점, 안타 개수, 3루타, 루타수, 도루 개수에서는 규정 타석에 이르고 있는 가운데 리그 최저를 기록했지만 전년도에 이어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동료인 가와카미 겐신도 2년 연속으로 수상하고 있어 같은 팀의 동일 배터리에 의한 2년 연속 수상은 센트럴 리그에서 처음이었다.
2008년
6월에는 오른쪽 옆구리 통증으로 등록이 말소되었고 이적 후 처음으로 2군에서 경기 출전하였다. 또 2004년에는 부상 당했던 허리 상태도 나빠졌고 다리가 저릴 정도의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요추의 추간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 그 해 오프, 허리에 있는 뼈의 일부를 깎아내는 수술을 받았다.
2009년
시즌 개막 직후부터 오른쪽 장딴지 부상으로 인해 약 1개월 간 결장했고 7월 5일의 한신전에서는 포수로서 노무라 가쓰야에게 계속되는 역대 2위인 통산 2328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9월 1일에는 개인 통산 200호 홈런과 함께 200개의 희생타를 달성했다(양쪽 모두를 달성한 것은 역대 3번째). 9월에는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인 4번째의 FA권을 취득했고 프로 21년차에 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0할대(에러 없음)의 수비율을 달성하여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다.
2010년
이듬해 7월 28일, 포수로서는 노무라 가쓰야 이후의 2500경기 출장을 달성했는데 이 기록은 프로 야구 역대 8번째였다. 타격 부진으로 인해 결장은 있었지만 시즌을 통해 등록이 말소되지 않았고 팀의 4년 만에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2011년
6월 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의 5회 수비 도중 다카야마 히사시와의 클로즈 플레이로 왼쪽 무릎 인대가 손상되어 약 2개월간 등록이 말소되었다. 다니시게가 부재된 사이에 팀은 15승 1무 21패의 성적으로 부진하였지만 다니시게는 그 와중에 재활 훈련과 상반신을 이용한 근력 트레이닝에 임하여 7월 29일 1군으로 복귀한 이후 타율 3할 1리, 23타점을 기록하면서 타격면에서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9월 말에는 10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하는 등 페넌트레이스 종반에 팀의 역전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8월 25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는 프로 23년째이자 통산 2594경기째에 프로 입문 이후 처음으로 1루수로서 선발 출전을 했는데 1루수에 한정하지 않고 정규 시즌에서 포수 이외의 수비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에서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는데 야쿠르트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모두 선발 출전했지만 무안타로 끝났다. 계속되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도 모두 선발 출전했지만 무안타는 계속돼 11월 20일 7차전에서는 3회 첫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시점에서 1989년 긴테쓰 버펄로스의 오이시 다이지로가 세운 이후 21타수 연속 무안타라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남겼다.
2012년
4월 25일 야쿠르트전에서는 홈런을 때려내 신인때부터 24년 연속 홈런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했고 7월 26일의 한신전에서도 2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이 홈런에 의한 통산 3000루타를 달성했다.
플레이 스타일
타격
타격 부문에서 타이틀을 획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96년에는 한 차례만 3할 대의 타율에 도달했던 적은 있지만 4차례나 센트럴 리그 규정 타석 도달자 중에 낮은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두 자릿수 홈런을 8차례 기록하는 등의 장타력은 있어 다음 타자가 투수인 경우가 많은 8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것이 많은 것으로부터 볼넷과 고의 사구가 많아 타율보다 1할 이상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시즌이 7차례 있는 것 외에도 2011년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현역 선수로서는 최다 고의 사구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희생 번트도 자신의 특기로 여기고 있어 대부분은 1루 방향으로 타구를 굴린다.
타순에는 기본적으로 8번 혹은 7번 타자이지만 주니치에 이적한 이후에는 주력 타자의 전력 이탈 시에 5번이나 6번 타자로 기용되는 경기도 증가되었다. 2004년과 2006년에 후쿠도메 고스케가 전력에서 이탈돼 높은 출루율과 득점권 타율이 기대되면서 3번 타자로 기용된 적도 있었다. 2004년 일본 시리즈에서도 후쿠도메가 부족한 타선 가운데 2차전 이후의 전체 6경기에서 6번으로 기용되었다.
수비
포수로서는 몸집이 작은 체격이지만 골든 글러브상을 6차례, 최우수 배터리상을 4차례나 수상했는데 특히 포구와 도루 저지가 뛰어나면서 도루 저지율이 리그 1위인 5차례를 기록하고 있다. 투수에게 상대 타자의 약점을 철저히 찌르게 하는 공격적인 리드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