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성(娘城)은 신라의 진흥왕(眞興王)이 남한강 상류 청풍강 유역을 점령하고 순수한 옛 국원에 읍성으로 소재지는 미상이다.
낭성(娘城)의 원전사료
진흥왕 12년(551) 3월에, 왕이 순수(巡守)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서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1]
청주 낭성의 학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지금의 청주부(淸州府)를 낭성(娘城)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부기하였다.
말송보화(末松保和)는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에서 “娘城は娘臂城·娘子谷の略稱づ今の淸州である”라고 청주지역에 낭성(娘城)으로 기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청주목 군명(郡名)에 “상당(上黨), 낭비성(娘臂城), 서원경(西原京), 청주(靑洲), 낭성(琅城), 전절군(全節軍)”이라고 실린 낭성(琅城)의 음운이 낭성(娘城)과 같아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성대리에 소재한 낭성산성(琅城山城)에 하림궁의 소재로 비정하고 낭성산성은 신라의 진흥왕 12년(551)에 왕이 변방을 순수(巡狩)하다가 우륵(于勒)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낭성(娘城)과 동음(同音)하여《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낭성으로 비정되기도 하여 주목된다.[2][3][4]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에 청주(淸州)의 연혁에는, 본래 백제상당(上黨)은 삼국사(三國史)에 백제의 지지(地志)를 말한다. 서원현(西原縣)의 일설에는 낭자곡성(娘子谷城)과 일설에는 낭비성(娘臂城)이라 한 것은 다 오류이다. 낭자곡성(娘子谷城)은 지금의 충주에 낭비성(娘臂城)으로 소재지는 상고할 수 없다.[6]
충주 낭성의 학설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에 충주(忠州)의 연혁에는, 본래 임나국(任那國)으로 후에 백제(百濟)가 소유하면서 별칭한 낭자곡성(狼子各城)은 일설에는 낭자성(娘子城), 일설에는 미을성(未乙省)이라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2년(551)에 공취하여 18년(557)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였다.[7] 이를 역사적인 사실로 본다면 당시 백제의 근거지인 서울부근이었으므로 충주(忠州)지역이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8]
양기석(梁起錫)은 지금의 청주지역인 청원군 낭성면의 낭성산성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을 거부하면서, 두 지명은 모두 지금의 충주 지역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9]
신라 진평왕(眞平王) 51년(629)에 김유신 등 신라의 대군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여 함락[11]하면서 비로소 629년에 이르러서 신라의 강역에 편입하였으므로 551년 당시 진흥왕이 순수한 낭성은 남한강 유역으로 판단된다.
신문왕(神文王) 5년(685)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여 아찬(阿湌)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았다.[12]
충주는 진흥왕 18년(557)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한 시기에 비하여 청주는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의 연차는 무려 128년이 지난 후 청주에 서원소경을 설치하여 충주지역으로 고증된다.
청풍강 유역은 삼국의 격전지로 신라는 550년 제천에 백제의 금현성(金峴城)과 단양에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취한 영토를 다음 해 551년 3월에 진흥왕이 청풍강 유역에 낭성(娘城)을 순수하면서 가궁(假宮)인 하림궁(河臨宮)에서 우륵(于勒)을 불러서 하림조(河臨調)를 경청한 것으로 고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