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는 전라남도해남군삼산면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 정책을 비판하고 반발하여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했다. 1969년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그 해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전남대 재학 시절에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학생 운동을 적극으로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10월 초 유신 헌법이 선포되자 그는 이강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로 유신을 반대하는 신문인 「함성」을 발간하였다. 이후 어렵게 「함성」을 운영하다가 1973년에 제호를 「고발」로 개칭하여 발간하였다. 그 해 「고발」을 전국에 배포하려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1973년국가보안법 혐의로 복역하고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당했다. 8개월간 복역한 후 해남으로 귀향해 농사일을 하였다. 1974년 〈진혼가〉와 〈잿더미〉를 위시해 시 7편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여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문학 활동 이외에도 전남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을 활발히 주도하였다.
사회운동
1975년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자, 그는 '시'와 '돌멩이를 든 데모대'로는 대한민국 사회 지배계급의 벽을 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의 조직'을 결성하기로 계획[1], 광주에서 사회과학책을 전문으로 파는 서점인 카프카를 열었으나 경영난으로 1년만에 문을 닫았다.[1]
1977년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의 모체가 된 해남농민회의 조직하여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 뒤 같은 해, 광주로 가서 황석영과 함께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가 사상성 문제로 수배받았다.
1980년남민전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다시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를 출간하였다. 1984년 수감 중 발간된 첫 시집 《진혼가》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우유팩에 날카롭게 간 칫솔대로 눌러 써서 지은 시와 산문을 면회객들을 이용해 감옥 밖으로 몰래 내보낸 것들이었다.
수년에 걸친 문인들의 구명 운동과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 곳곳의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문과 서한을 정부에 발송하였으나 전두환 정부는 거부했다. 1987년6월 항쟁 다음 해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1988년 12월, 형 집행 정지를 처분받고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상임 이사를 맡으면서 활발한 문학 활동과 사회 참여 활동을 병행하였다. 창작 이외에도 프란츠 파농, 파블로 네루다 등의 외국의 사회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옥중에서도 시와 수필을 계속 썼으며, 편지와 서신을 보내 청년 운동가들을 독려하였다. 김남주는 옥중 서신에서 일본어를 배워서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2]
그는 전사 시인, 혁명 시인[2] 으로도 알려졌는데 그가 '시인'이 아닌 '전사[1]'라고 자칭하였다.
석방과 타계
1989년 그는 10년 넘게 자신의 옥바라지를 한 남민전 동지 박광숙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19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이 되었으나 1992년췌장암으로 건강이 악화하여 사퇴하였다.
1993년2월 군사독재 정권이 붕괴되고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 출범 직후 대통령김영삼의 특별 지시로 사면되어 복권되었다. 그러나 수감에 따른 후유증과 과로로 말미암아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초 광화문 인근의 한 병원에 입원하였고, 결국 그해 2월 13일 췌장암을 이겨 내지 못하고 별세했다. 사후 광주북구망월동 5.18 묘역에 안장되었다.
사후
2000년 그의 시에 곡을 붙인 안치환의 헌정 앨범 《Remember》가 발매되었다. 같은 해 5월 광주 중외공원에 〈노래〉가 새겨진 시비가 제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