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의 합일 후 무로마치 막부는 히고 슈고 직인 아소 씨(阿蘇氏)가 기쿠치 씨에 압도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하여 가네토모를 히고 슈고 직에 임명하였다.[1] 그러나 가네토모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로마치 막부에 대해 반항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에이쿄 2년(1431년)에는 쇼니 미쓰사다(少弐満貞)와 연합하여 오우치 모리미(大内盛見)를 쳤다.
그러나 그 후, 막부의 태도에 대한 의견 대립과 차남 다다치카(忠親)를 편애한 나머지 장남 모치토모(持朝)와 대립하게 되었으며, 결국 모치토모에게 가독을 빼앗기고 아시키타 군(蘆北郡) 사시키(佐敷)로 쫓겨났다. 좌절한 가네토모는 분안 원년 3월 8일에 사망했다.
한편 한국의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1417년) 6월 11일(을미) 기사에는 국지전(菊池殿, 기쿠치도노)의 사송인(使送人)이 조선 조정의 조아례(朝衙禮)에 참여하고, 이어서 환국을 고하였다[2]는 기록이 있다.
각주
↑가네토모의 슈고로써의 발급 문서로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오에이(応永) 18년(1412년)의 것이다(応永18年11月19日付正観寺方丈宛菊池兼朝安堵状(『正観寺文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