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량(橋梁, bridge) 혹은 다리는 도로, 철도, 수로 등의 운송로 상에 장애가 되는 하천, 계곡, 강, 호수, 해안, 해협, 등을 건너거나, 또 다른 도로, 철도, 가옥, 농경지, 시가지 등을 통과할 목적으로 건설되는 구조물을 총칭할 수 있다. 다리는 도로, 철도의 계획노선상의 장애물을 통과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인간의 생활이 풍족하여지면서 교량은 단순한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만 갖는 것이 아니라, 인류환경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면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문학과 예술작품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다리는 한 도시의 문화유산이며, 아름다운 조형물로서 심미적, 환경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어원
교(橋), 교량(橋梁)이 다리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교(橋)는 양쪽 언덕 사이를 넘어가는 것을 뜻하고, 양(梁)은 나무를 걸쳐 물을 건너가는 것을 뜻하므로 모두 같은 뜻을 갖고 있다.
로마 사람들은 “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상징”이라고 믿었으며, 이 시대에는 많은 다리가 신부(神父)에 의해 건설되었다. 대사제나 교황을 뜻하는 폰티프(영어: pontiff)[1]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에서 유래된 고대 프랑스어 폰티프(pontif)에서 온 말인데, 이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라틴어: pons)와 ‘만들다’는 뜻인 파키오(라틴어: faciō)가 합친 말이다.
동양에서는 많은 아치교가 절 앞에 만들어졌는데 이는 속세로부터 무지개를 타고 불국(佛國)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2]
역사
다리의 시초는 인류가 어로 활동을 하거나 이동할 때 시내나 늪을 건너기 용이하게 하기 위해 통나무나 큰 돌을 놓으면서였다. 징검다리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다리이다. 기원전 약 3807년 경에 지어진 영국에 스위트 트랙과 기원전 약 3838년 경에 지어진 포스트 트랙이라는 원시적인 다리가 있다. 아치형 다리는 기원전 4000년 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목재 다리 중 가장 오래된 다리는 스위스취리히 호수 상류에 있는 라퍼스빌-후르덴 목교(Holzbrücke Rapperswil-Hurden)다. 제담 서쪽에서 발견된 나무 더미는 기원전 1523년 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 다리 기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413년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실성이사금조〉(實聖履師今條)에 따르면 '신성 평양주 대교'라는 한국의 다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나온다. 통일신라 시기『삼국사기』경덕왕 19년(760년)조에 "궁의 남쪽 문천(蚊川)에 '월정과 춘양'이라는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나오며, 현재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로 다리 터가 남아있다.
고려 시대의 다리는 선죽교, 진천 농다리[주 1]가 대표적이다. 조선 시대에는 다양한 재료와 다양한 용도로 다리가 만들어졌다. 하폭이 넓은 강에는 나룻배를 이어 만드는 배다리도 놓았다. 대표적인 다리는 수표교가 있다.[3]
분류
교량은 사용용도, 사용재료, 노면의 위치, 교량의 평면형상, 교량의 평면선형, 가설지점, 교량의 가동여부, 내용년수, 설계하중 구조형식 등에 따라 분류할 수 있며, 이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형식을 분류하기도 한다.
주탑: 사장교나 현수교에서 주케이블이 연결되는 큰 철근콘크리트 또는 강구조 탑을 주탑이라고 한다. 주탑이 높을수록 사장교 또는 현수교의 케이블이 받는 하중이 작아진다. 같은 경간의 다리를 놓을 때 주탑이 높다면 케이블의 단면을 줄일 수 있어 경제적이고, 같은 케이블 단면으로 시공한다면 경간을 늘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5]
경간: 교대와 교각, 또는 교각과 이웃 교각 사이를 경간이라 하며, 이 거리를 '경간장'이라고 한다. 해협이나 협곡에 세워지는 교량은 교각을 여러 개 설치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경간장이 긴 교량일수록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요구한다.[4]
접속슬래브(approach slab, approach cushion): 교량상부구조와 교량외부의 노면을 연결하는 구조물. 교량 외부의 도로를 구성하는 지반이 침하하게 되면 교량부분의 도로와 교량 외부 도로간에 높이차가 발생한다.(단차 발생)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다.
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鶴橋面) 고막리(古幕里) 고막천(古幕川)에 있는 고려시대의 돌다리[石橋]로 보물137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 고유의 마루의 구조를 석교에 적용한 다리로 여러 차례 붕괴후 재건설되었다. 현재는 원래 길이의 절반정도만 원래의 석재를 이용하여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는 새로운 석재로 재건된 상태이다. 목포에서 국도 1호선을 타고 나주로 가는 길에 함평 천지 휴게소를 지나있는 고막천상에 있어 잠깐 고개를 돌리면 볼 수 있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에 있는 홍교로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다리이다. 선암사를 들어가는 길은 계곡을 끼고 올라가는데 이 길이 계곡을 건너면서 홍교로 이어져 있다. 승선교와 승선교 아래쪽의 홍교등 2개의 홍교가 있다. 선암사의 명물로 2004년에 홍교를 재축조하고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전남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홍교로 옛 고흥성벽의 수문으로 보인다. 교량으로서의 의미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기타
많은 문헌에는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를 한국 최고의 교량이라 하고 있는데 이는 교량이라기보다는 건축물에 부속된 조형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밖에 창경궁이나 경복궁 등에 많은 석교들이 있으나 이 또한 조경적인 의미가 강하여 위에 언급한 다리들과 같이 통행이 주목적인 실용적인 다리와는 차별된다 할 수 있다.
남해대교는 경상남도남해군 설천면(雪川面) 노량리(露梁里)와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노량리를 잇는 다리로서, 대한민국 최초(1973년)의 현수교이다. 길이 660m, 너비 12m, 높이 52m이며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3년 6월 22일 준공되었다. 보강형은 3경간 힌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선형의 강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공기역학적인 고려때문으로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성형 강상형을 보강형으로 사용한 교량이다. 설계는 일본회사가 하였으나 시공은 현대건설이 하였다. 교령이 40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에 유지보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삼천포 대교가 준공되기 전에는 남해도를 출입하는 유일한 교량으로 중차량의 통행으로 많은 피로균열이 발견되었다. 현재 내부에 이의 보강을 위한 보강트러스가 설치되어 있다.
1984년 12월에 준공된 돌산대교는 여수시 대교동과 여수시 돌산읍 우두리 사이를 잇는 교량으로 길이 450m, 폭 11.7m, 높이 62m의 사장교이다. 돌산대교와 진도대교는 일종의 쌍둥이 교량으로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설계사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설계사는 영국사이고 시공은 대림산업이 수행하였다. 조류가 세지 않은 내해에 설치된 교량으로 기초는 공기케이슨을 이용하여 시공되었다. 이런 이유에서 지상에 기초를 설치한 진도대교에 비하여 준공이 늦어졌다.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과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을 연결하는 사장교다. 총 길이는 484m에 교량이 11.7m이다. 1980년 12월 착공되어 1984년 10월 18일 개통하였다. 돌산대교와 동일한 단면형태를 가지고 있는 강사장교로서 설치되는 구간이 조류가 거센 울둘목이기 때문에 기초가 육상에 설치되었다. 시공사는 현대건설이다. 진도측에는 교량의 상징물로 진도개가 해남쪽에는 거북선이 설치되어 있다. 설계하중은 DB18로 현재 2등교이다. 그러나 2005년에 제2진도대교가 DB24의 설계하중으로 건설되었다. 2006년과 2007년 다리 동쪽으로 조력발전소를 설치를 위해 바지선으로 운송중이던 자켓구조물이 강한 물살에 떠밀려 진도대교에 충돌하였다. 1차 충돌은 큰 손상이 없었으나 2차충돌에서 케이블 정착구가 직격되면서 케이블에 손상이와 케이블을 교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