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감 측우대(觀象監 測雨臺)는 조선시대의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 있던 측우대이다.[A] 측우대란 측우기를 올려 놓고 강우량을 재던 것으로 지금은 대석만 남아 있다.[B]1985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2]
조선 세종의 치적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강우의 측정을 위한 과학기구의 제작과 보급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청계천과 한강에 눈금을 표시한 수표(水標)를 세워 개천과 강물의 수량을 정확히 측정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전까지의 지역적인 오차가 심한 측우 방식을 타개하고자,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측우기를 다량으로 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 보급하였으며, 그 결과를 전국적으로 취합하였다. 이러한 치적은 현대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측정의 계량화를 시도한 것으로, 서양보다도 약 200년이나 앞서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의미한다. 그런데 세종 때에 다량의 측우기가 만들어져 전국적으로 보급되었음에 불구하고, 그때 만들어진 측우기는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측우기를 올렸던 대석만이 단 한 점 남아 있을 뿐이고, 그것이 바로 본 유물이다. 대석이 윗면에 직경 16.5cm, 깊이 4.7cm의 구멍이 파져 있어, 그 위에 측우기를 올려놓았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 서운관(書雲觀)에 대를 만들어 그 위에 측우기를 놓고 비가 그칠 때마다 본관 관원이 강우 상황을 직접 관찰하여 주척(周尺)으로써 수심을 측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본 유물이 현재의 기상청으로 옮겨지기 전에는 서울 매동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그 자리는 1934년 경복궁 구 대루원(待漏院) 금부직방(禁府直房) 터였으며, 이 터는 고종 초에 경복궁 재건 후 북방 광화방 관상감을 옮겨 놓았던 곳이라 한다. 따라서 본 유물은 관상감 자리에 있다가 고종의 경복궁 재건 시에 지금의 매동초등학교 옮겨진 것으로 추정될 수 있으며, 결론적으로 세종 때에 만들어진 측우대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유물의 제작연대를 분명히 할 수 있는 명문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제작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는 실정이다.
각주
내용
↑관상감(觀象監)은 조선시대 천문(天文)ㆍ지리학(地理學)ㆍ역수(曆數)ㆍ측후(測候)ㆍ각루(刻漏) 등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측우기를 올려 놓고 측정하던 대(臺)는 측우기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유물로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