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초기 명나라는 베트남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지만, 타인호아 지방 구릉지대의 농민 출신의 레러이(黎利)는 1418년 동지를 규합하여 명나라 지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명나라군을 완전히 국외로 축출하고 베트남 독립을 회복했다. 그리고 1428년 하노이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대월(大越)로 정하고 레 왕조를 창시했다.
레러이는 황족을 푸대접하고, 황제독재체제를 시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정권의 중추는 레러이와 함께 명나라와 전투를 벌린 개국공신(대부분이 청화 출신)에 의해서 차지하였다. 개국공신들은 역대 황제를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지방에 많은 영지를 가진 호족으로서 정권을 주도했다. 전기 레 왕조의 역사는 개국공신과 그의 자손사이의 권력 투쟁이 제위 계승 싸움과 결합되는 형태로 변화했다. 레 왕조는 군제, 지방제도, 재정제도를 잘 정비하고 명조에도 사신을 보내어 책봉(冊封)을 받음으로써 내정·외교가 함께 안정되어 15세기 말에는 그 권세의 절정기를 맞게 되었다. 레 왕조 지배시대는 베트남의 예술이나 문학이 장려되어 개화한 시기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 분야에서 중국의 영향이 강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작품은 자유로움과 민족적 독자성이 두드러진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1434년 레러이가 죽자, 아들인 레타이똥이 즉위 했다. 즉위 할때에 불과 11살이였고, 당초 레삿(Lê Sát) 이라고 하는 인물이 섭정에 임하고 있었지만, 친정을 개시하였다. 또 태종 시대에 과거제도를 확립하여, 1442년에는 첫 진사 합격자를 등용하였다.
1443년레년똥이 불과 2살에 즉위 하여, 예전보다 레 왕조와 참파와의 분쟁이 계속되었다. 참파와 전투 중에서 참파왕 마하브샤를 포로로 잡는 등, 군사적으로 강했던 시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생모 즈엉티(Dương Thị)가 태종의 총애를 잃어 즉위 할 수 없었던 것을 원망한 레응이전(Lê Nghi Dân)[1]이 1459년 궁에 침입하여 인종과 그 생모 레티(Lê Thị)를 살해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레 왕조 조정에 혼란이 생겼지만, 1460년 응우옌씨(Nguyễn Xí)와 딘리엣(Đinh Liệt)등의 세력이 레응이전을 폐위시키고, 태종의 넷째 아들인 레타인똥(Lê Thánh Tông)을 옹립 하였다.
성종의 시대는 명나라와 우호 관계가 유지된 것에 대하여, 참파와 대립이 심해졌던 시대이다. 1470년 참파 제15왕조 제 2대왕인 반 라체트안이 화주에 침공하자, 레 성종은 25만 군사를 이끌고 참파의 수도인 비자야를 공략하여 라체트안을 포로로 잡고, 참파를 예속 하였다. 이후 소수 민족(참인)으로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라오스에 존재한 란쌍 왕국 공격을 하였고 그 외 율령제도의 정비 등에 의해서 번영을 맞이하였다. 성종은 개국공신 세력을 제압하였다. 그러나 그 번영도 계속되지 않고, 그 다음 세대인 헌종(Hiến Tông)이 요절하고, 그 아들인 숙종(Túc Tông), 위묵제(Uy Mục)가 연달아 즉위 했지만, 국운은 더 쇠약해져갔다.
특히 위묵제의 포학성은 명사인 허천석이 뀌브엉라고 기록되었고, 1509년 사촌동생 레쯔우를 중심으로 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레쯔우는 뜨엉즉제로서 즉위 했다. 그러나 양익제도 즉위 후는 향락에 빠져, 황족을 살해하는 등의 포학성을 들어내어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고, 1516년 살해되었고 계속되어 티에우똥이 즉위 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서 조정 내의 권신이 사병으로 항쟁을 펼치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티에우똥이 하이즈엉출신의 무인 막당중이 관군의 지휘를 맡기면서, 막당중의 전횡이 심해져서, 그 전횡에 신변의 위험을 느낀 티에우똥은 궁을 탈출하여, 떠이낀의 찐뚜이에게 도망갔다.
막당중은 티에우똥을 추적하는 군사를 보내는 것과 동시에, 티에우똥의 동생 꿍호앙데를 옹립 하였다. 이렇게 하여 꿍호앙데를 허수아비 황제를 세운 막등용과 소종을 보호하는 정수의 사이에서 항쟁이 일어났다. 이 항쟁은 막등용이 유리하게 진행되어 1525년에는 소종을 연금 하여 1527년 살해하는 것과 동시에 공황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레 왕조는 멸망했다.
후기 역사
막당중에 의해 레 왕조는 멸망했지만, 레 왕조의 옛 신하인 응우옌낌(Nguyễn Kim, 阮淦)은 1532년 레닌을 옹립 하여 반막 왕조 타도를 전개하여, 다음 해에는 레닌을 황제(장종)에 즉위 시켜 레 왕조의 재흥을 하였다. 무력으로 대립한 막 왕조와 이외에도 명나라에 정유료를 사신으로 보내어 레닌이 대월국의 국왕의 정통성 승인을 요구하는 것과 동시에, 찬탈자인 막등용에게 문죄를 요구하였다.
후기 레 왕조의 실권은 응우옌낌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막 왕조에서 항복한 장수에게 암살되어 사위 찐끼엠(Trịnh Kiểm, 鄭檢)이 뒤를 이었다. 이후, 레 왕조의 실권을 장악 하는 찐씨와 막씨와의 사이에 내전이 계속되었다. 1592년 찐끼엠의 아들인 찐뚱(Trịnh Tùng, 鄭松)이 정권을 장악하고, 하노이를 탈취한 찐뚱은 막 왕조의 군주인 막머우헙을 살해하고, 여기에서 레 왕조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후기 레 왕조는 레씨의 황위가 말로만 회복됐지 그 실권은 찐씨의 수중에 있어, 레 왕조 황제는 허수아비 군주였다. 레막전쟁을 통해서 레 왕조는 완전하게 찐뚱에 의해 장악 되었다. 1599년에는 영종(Lê Trung Tông, 黎英宗)을 살해하고, 다섯 번째 아들인 세종(Lê Thế Tông, 黎世宗)을 옹립 하여 스스로는 평안왕이 되어, 세종이 죽고 경종을 옹립 하였고, 1619년 경종을 살해하고 신종( Lê Thần Tông, 黎神宗)을 옹립하였다. 또 찐뚱의 후계자인 찐짱(Trịnh Tráng, 鄭梉)은 남명(南明)으로부터 부왕으로 책봉되고 또 그 아들인 찐딱(Trịnh Tạc, 鄭柞)은 서왕(Tây Vương, 西王)을 자칭하는 등, 북부 하노이를 거점으로 하여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찐씨가 막 왕조와 사투를 펼치는 동안, 응우옌낌의 아들 응우옌호앙(Nguyễn Hoàng, 阮潢)은 찐끼엠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당시 변경이었던 투언호아(Thuận Hóa)[2],꽝남[3]의 지방장관으로서 부임했다. 이후, 푸쑤언(현 후에)을 거점으로 현재의 중부 베트남에서 지반을 굳혀 반독립 정권(광남 완씨)을 만들어냈지만, 1592년 찐씨가 하노이를 공략한 후에는 군사를 이끌고 북상, 막씨 잔당 진압에 활약하는 등, 찐씨와 표면화해 대립할 것은 없었다. 응우옌호앙이 죽고, 아들 응우옌푹응우옌(Nguyễn Phúc Nguyên, 阮福源) 때 찐씨와 응우옌씨와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17세기 두 정권은 격돌하다가, 결과를 보는 일 없이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1771년 남방을 지배하고 있던 응우옌씨에 폭정으로 대항하여 떠이선당의 난이 일어나자, 응우옌씨 세력이 멸망하자, 레 왕조 황제의 실권 회복을 주장하는 떠이선 왕조는 일족 내에서 정황이 동요하고 있던 찐씨 토벌로 향하고, 1786년 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하노이에서 허수아비 군주로 지냈던 찌에우통제는 1788년 떠이선 왕조에게 저항하고자, 청나라의 원군을 얻어 반격을 했지만, 응우옌 후에가 인솔하는 군사에 패망 청나라에 망명하여 후 레 왕조는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