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오마스(핀란드어: Tuomas)는 존재가 확실시되는 핀란드 주교들 중 가장 초기 인물이다. 그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1234년경에서 1245년까지 핀란드 주교로 사목하다가, 주교직을 사퇴하고 3년 뒤 스웨덴비스뷔에서 죽었다고 한다.
투오마스 주교의 존재를 증거하는 유일한 사료는 1234년 노우시아이넨에서 투오마스의 이름으로 서명된 서한이다. 이 서한에서 투오마스는 빌헬름이라는 담당사제에게 땅을 주어 교구를 사목하게 했다.[1] 이렇게 주교가 사제에게 땅을 마음대로 줄 수 있었던 것은 1229년 초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핀란드의 모든 비기독교인의 땅은 교회에 귀속시킬 수 있다고 허했기 때문일 것이다.[2] 이 서한은 핀란드에서 작성된 가장 오래된 편지다.
그 뒤 투오마스 주교는 그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다가, 1245년 2월 21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그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다시 등장한다.[3] 교황은 투오마스가 고문치사, 교황서한 조작 등 여러 중범죄를 저질렀음을 스스로 고백했다고 말했다.[4] 이에 핀란드 교구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웁살라 대주교와 다키아의 도미니코회 소수도원장이 파견되었다.[5] 투오마스의 주교 재임 중에 기독교에 저항하는 원주민들의 해메 분란이 발생했는데, 투오마스가 고백한 스스로의 죄에 미루어 보아 그가 기독교 개종사업을 강압적으로 몰아붙였음을 짐작케 한다.
투오마스가 사퇴한 뒤 핀란드 주교는 마땅히 후임자가 없었고, 교황특사 굴리엘모 디 모데나가 적어도 1248년 6월 5일까지 주교대행으로서 교구를 관리했다.[6] 핀란드 교구는 1241년에서 1248년 사이의 스웨덴측 사료들에서 언급 자체가 사라졌다가, 1253년부터 다시 등장한다.[7] 투오마스는 시그투나에 새로 세워진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자신의 장서를 모두 기부하고[8]고틀란드섬비스뷔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가 거기서 여생을 보내다 제2차 스웨덴 십자군 직전인 1248년 죽었다.[9]
투오마스는 존재가 확실시되는 핀란드 주교들 중 첫 번째이지만, 최초의 핀란드 주교였을 것 같지는 않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쓴 서한에서 핀란드 주교가 살해당했다(이름은 언급되지 않음)는 내용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10] 15세기에 쓰여진 연대기들에는 헨리쿠스, 로돌푸스, 폴퀴누스 같은 전대 주교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이 사람들은 실존을 증명할 만한 사료가 없다.
↑“Confirmation of the donation”. 2007년 9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In Latin. One of the books ("Cod. Ups. C 134") still survives, with a curse보관됨 18 11월 2007 - 웨이백 머신 written on it by the monks in case someone steals it. See also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