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티는 이탈리아의 옛 도시들 중에서도 오래된 도시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스가 기원전 1181년에 세웠다고 하며, 그의 어머니 테티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테아테(그리스어: Θεάτη)(라틴어로는 Teate)라고 이름을 지었다. 테아테 마루키노룸(Theate Marrucinorum)이라고 불리던 키에티는 호전적인 마루키니인의 수도였다. 고대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에 의하면 테게아테(Θηγεάτη, Thegeate)라는 이름으로 아르카디아인들이 세웠다고 한다.
로마인들에게 패한 후, 마루키니인들은 로마의 충성스러운 동맹이 되었고 나중에 이 지역은 동맹시 전쟁이 끝나고 나서 로마로부터 지방 자치권을 부여받게 된다. 제정 시대에는 거주 인구가 무려 6만 명에 달했지만,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 나서는 헤룰리족과 서고트족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휘하에 있는 가스타르드의 지배를 받았다.
키에티는 이탈리아 남부가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는 동안 정치적·경제적 중요성을 회복하였고, 호엔슈타우펜 왕가, 앙주 왕가 그리고 아라곤 왕가의 지배 하에서도 그 중요성이 유지되었다. 반종교 개혁의 후원을 받은 경제적, 건축학적인 번영이 끝난 17세기에 들어서, 키에티는 1656년에 전염병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8세기에는 도시의 예술적 유적들을 남겨준 대학과 학교 등 교육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1806년에 키에티는 나폴레옹이 이끌던 프랑스 정부에 의하여 요새로 바뀌게 된다. 1860년에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로마와 같이 무방비 도시로 선언되어 폭격을 받지 않았고, 이로 인해 당시 키에티는 인근의 마을과 소도시들로부터 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떠난 지 하루 뒤인 1944년 6월 9일에 도시를 해방시켰다.
키에티 대학교(Università G. d'Annunzio - Chieti e Pescara)는 키에티와 페스카라를 연고로 하고 정원 35,000명의 학생들이 있으며 건축학, 철학, 교육, 외국어, 문학, 경영, 의학, 약학, 심리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스포츠 의학 등의 전공이 개설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