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전에도 정착지가 있던 쿠마에는 기원전 8세기[2]에 최초 정착자들이 모도시로 서술한 에우보이아의 칼키스와 에레트리아에서 온 에우보이아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세웠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피테쿠사에 (오늘날 이스키아섬)에도 식민지를 세웠으며,[3] 이들은 칼키스의 메가스테네스와 키메의 히포클레스가 이끈 오이키스테스 (정착자)들이였다.[4]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대체한 청동기 문명의 토착인들의 주거지에 정착했고, 이들에 대한 흔적은 기이한 전승을 지닌 킴메르인들이라 불린 동굴인들로 보호되고 있다.[5] 이들의 명칭은 에우보이아의 키메 반도를 나타낸다. 이 식민지는 식민지인들이 사용한 지방의 변형된 그리스 문자인 에우보이아 문자가 전래된 이탈리아 반도의 진입점이며, 이 문자는 에트루리아인들이 받아들이고 수정하였고, 그 뒤에는 로마인들 역시 그리하여 오늘날 전세계에서 사용되는 라틴 문자가 되었다.
식민지는 번창하였다. 기원전 8세기에는 시칠리아의 잔클레의 설립자들인 페리에레스와 그의 무리들을 보낼 정도로 충분히 강했으며, 또 다른 파견대는 파우사니아스가 말했던 아카이아의 트리테이아를 세우고 돌아왔다.[6] 기원전 6세기와 7세기에는 영향력이 쿠마에 지역을 넘어, 푸테올리와 미세눔을 흔들어냈고, 그리고나서 기원전 470년에 네아폴리스를 세웠다. 이 모든 사실들은 그후로도 오랜 기간 상기되었으며, 저술서에서 쿠마에의 첫 동시대 언급은 투키디데스의 것이였다.
쿠마에 그리스인들의 커저가는 힘은 그 지역 일대의 토착 부족들이 그들에 맞서 연합하게 하였고, 특히 카푸아의 에트루리아의 지휘하에 다우니족과 아우룬키족이 그랬다. 이 동맹은 기원전 524년에 귀족정을 무너트리고 스스로 참주에 올랐다가 암살당한 말라쿠스라고 불린 아리스토데무스[7]가 이끄는 쿠마에군에게 패배했다.
로마인과 쿠마에인 사이의 접촉은 아리스토데무스 집권 시기에 기록되었다. 리비우스는 로마와 클루시움 사이 전쟁 바로 이전에, 로마 원로원은 로마가 포위당할 것을 예상하고 곡물을 구입하기 위해 쿠마에에 사절을 파견했다고 한다.[8] 또한 로마의 전설적인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레길루스 호수 전투 이후 쿠마에에서 아리스토데무스에게 망명 생활을 했었고 기원전 495년 그곳에서 사망했다.[9] 리비우스는 아리스토데무스가 타르퀴니우스의 후계자가 되었으며, 기원전 492년에 로마의 사절단이 곡물을 구입하러 쿠마에에 갔을때, 아리스토데무스는 타르퀴니우스의 망명 당시에 빼앗긴 그의 재산이라고 하여 사절의 종들을 가져갔다고 했다.[10]
아리스토데무스 통치 시기에 쿠마에의 군대는 클루시움의 에트루리아 군대를 패배시키기 위해 라틴 동맹의 도시 아리키아를 도왔다.
로마의 통치하에서, “평온한 쿠마에”는 고트 전쟁의 재앙까지 조용히 지냈고, 그 이후로 네아폴리스를 제외하면 캄파니아의 유일한 요새화된 도시였던 이곳은 반복적으로 침입을 당했으며, 536년에는 벨리사리우스가 점령했었고, 토틸라도 이곳을 보유했었으며, 나르세스가 쿠마에를 점령했을 때, 그는 고트족의 모든 재산을 그가 가졌음을 알았다. 1207년에 시칠리아 왕을 섬기는 나폴리의 군대가 도적들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도시와 성벽을 파괴하였다.
↑에우세비우스는 쿠마에의 그리스 정착지를 기원전 1050년으로 잡았으며;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최초 정착자들의 무덤을 발견하지는 못 했지만 약 750-50년의 그리스 도자기 파편들을 도시 외벽에서 발견했다 (로빈 레인 폭스, Travelling Heroes in the Epic Age of Homer, 2008: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