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섬인 상추자도와 하추자도가 추자대교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횡간도, 추포도를 포함한 4개의 유인도,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추자군도의 전체 면적은 7.05 km2이며, 인구는 2019년 12월 31일 주민등록 기준으로 1,733 명이다.
역사
추자군도는 행정구역상 제주특별자치도에 속해 있으나,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완도군과 접해 있고 언어·문화적으로도 전라남도에 가깝다.
추자도는 고려 시대부터 한반도 육지부에서 나주, 해남, 강진을 거쳐 제주로 건너가기 위한 관문 역할을 한 곳이었다.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추자도에 정박한 적이 있고, 다시 1374년에 최영(崔瑩)이 목호의 난 진압을 위해 제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추자도에 정박하여 추자도 어민들에게 그물 짜는 법을 알려주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최영 장군의 사당이 세워졌다.
《원사》(元史)에는 지원(至元) 30년(고려 충렬왕 30년, 1293년)에 조서를 내려 탐라(제주도)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물길의 요충지마다 30곳의 수역(水驛)을 세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한 곳이 추자도로써 조선 초기까지 당시 세운 수참(水站)의 흔적이 추자도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 본섬에서 추자도로 고기잡이하러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일본이나 중국에 표류하는 일도 적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청 건륭 5년(1740년) 중국 강남의 소전현 백성이 바닷가에서 무역하다가 풍랑으로 표류해 조선의 추자도까지 떠내려가서 구조되어 돌아왔다는 《대청회전》(大淸會典)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10년(1323년)에 군산도에 침입한 왜구가 추자도에 출몰해 노약자를 잡아간 것을 시작으로, 조선성종 25년(1494년)에도 왜선 4척이 추자도에 출몰해 제주도에서 진상하던 공물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1926년 추자도의 어업조합장 김상진이 식산은행 제주지점에서 차입한 4천 원으로 소금을 사서 시중가보다 비싸게 조합원들에게 팔고, 어민이 캔 천초를 이사 황석희 등 직원들과 짜고 강제로 매수하려 하였다. 이에 어민들이 저항하자 김상진은 추자경찰관 주재소에 연락해 이들을 구속시켰다. 그러나, 그에 굴하지 않고 예초리 어민 7백여 명이 5월 11일 추자도 어업조합의 부정을 규탄하면서 공동 판매 폐지와 조합장 처벌을 외치며 어업조합으로 난입하였다. 이에 김상진은 목포로 달아나고 추자도 주재소 경찰들이 공포탄을 쏘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으로 21명이 검거되고, 김종만 등 7명이 옥고를 치렀다.(추자도 어민항쟁) 1932년 5월에도 일본 어부들의 유자망 어업으로 연안 어족들이 거의 고갈되다시피 하자 추자도 어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였고 많은 어민들이 구금되었으며, 당시 김봉수(영흥리), 박병석(영흥리) 외 11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지리
추자군도는 황해와 남해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어족이 풍부하고 어장이 잘 발달되어 있다. 주민 대부분이 어업 및 어업 관련 산업에 종사한다. 주요 어종으로는 조기·멸치·삼치·방어 등이 있으며, 멸치젓의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