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순(金時範, 1896년 12월 17일 ~ 1936년 7월 6일)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기자.
생애
독립 운동
1917년 3월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교 정경과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29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학생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고국의 처지를 생각해 낭비 경계와 학업 충실에 대해 호소했다. 이후 1919년 2월 8일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유학생대회에 참여해 조선청년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실행방법 등에 대해 의논했다.
1922년 6월 귀국한 후 상해의 정일성, 고권삼 등과 연락하며 러시아, 중국의 국제정세와 독립운동 등의 소식을 교환했다. 1926년 8월 22일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할 때 동아일보 1면의 「횡설수설」 코너에 일제의 공산주의자 체포, 언론 탄압, 집회 금지 등을 언급하며 일명 ‘문화정치’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이광수의 민족 재조론을 비판하기 까지도 했다. 훗날 이광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해 결국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민족 반역자가 되었다.
1927년 1월 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 조직을 계획하고 3차례에 걸쳐 발기인회를 개최하는 데 참여했다. 한편으로 신석우를 대표로 내세워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교섭해 ‘정치운동은 하지 않고 연구에 머문다’는 제한적인 조건으로 설립 인가를 얻었다. 이로써 2월 15일 신간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기회주의 일체 부인’을 포함한 강령을 결의했다. 최원순은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과 조선웅변연구회 창립 등에 참여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최원순은 도쿄 유학 중에 2.8 독립선언에 참여해 체포됐다가 방면됐다. 이러한 항일적 행동으로 이른바 ‘요시찰인’이 돼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항일적 기사 게재로 인해 1926년 10월 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소를 제기해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월로 감형됐다. 그러나 상고를 제기해 1927년 2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면소됐다.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