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국력의 차이가 현저한 프랑스와 전쟁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으나, 왕비 루이제 폰 메클렌부르크, 프로이센 왕자 루이 페르디난트 같은 반나폴레옹의 선봉은 왕을 설득하여, 결국 전쟁을 벌이게 한다.
프로이센군을 동원했지만, 작전 계획이나 지휘권의 소재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원은 부진했다. 1806년9월 26일 프로이센은 프랑스군에게 독일에서 철수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이때는 전날 9월 25일 나폴레옹이 파리를 출발한 후였다.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초동 지연은 프랑스군에 대비를 할 시간만 벌어 주었다.
10월 9일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고 15만 병력으로 튀링겐을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즉시 20만 병력으로 바이에른에서 작센 방면을 향해 진격하였다. 10월 10일, 《잘펠트 전투》에서 란누 군단이 프로이센군 선봉 루이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전사했다.
프랑스군은 패주하는 프로이센군을 추격하여, 10월 25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였다. 10월 27일 나폴레옹은 베를린에 입성했다. 개전부터 불과 19일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묘를 방문한 나폴레옹은 "그가 살아있다면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있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1월 6일, 마그데부르크의 수비대가 항복했고, 사실상 국내 프로이센군은 소멸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동프로이센에 몽진하여 쾨니히스베르크를 임시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는 10만 명의 원군을 동프로이센에 집결시켰다. 나폴레옹은 폴란드로 진군했고, 폴란드는 나폴레옹을 조국의 해방자로 열렬히 환영했다.
1807년 1월, 추위를 뚫고 프랑스군은 쾨니히스베르크 향해 침공하였다. 2월 7일-8일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과 《아일라우 전투》에서 충돌했다. 블리자드의 전투는 어려운 전투가 되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군의 철수로 신승을 얻는다, 양군 모두 엄청난 사상자를 내었고, 결론은 나지 않았다. 프랑스군은 일단 후퇴를 루훼부루를 사령탑으로 3월 18일부터 단치히 자유시의 공방전을 시작했고 5월 27일 프로이센군 수비대가 항복했다.
러시아군도 조직을 정비하고 6월 활동을 재개한다. 6월 10일하이루스베르크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대해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후퇴를 선택했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 출격 거점을 타격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로 군을 이동시켰다. 러시아군은 가장 동쪽 깊숙히 진격해온 란누 군단을 공격하려 시도했지만,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 주력에 포착되었고,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큰 타격을 받았다. 6월 16일스르트가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했고, 프로이센은 완전히 패배했다.
7월 7일 - 9일,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강화를 하고, 동맹에서 탈퇴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에서 할양했던 영토에 베스트팔렌 왕국을 건국하고,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또한 폴란드를 독립시켜 바르샤바 공국을 건국했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중유럽 및 동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