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李相潤, 1960년12월 21일 ~ )은 KBO 리그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였다. 우투우타로,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 대회 준우승의 주역으로[1] 베스트 10에 우완 투수로 뽑힌 해태 타이거즈 초창기의 최고 에이스였다.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당시 시속 145km를 넘나드는 강속구에 제구력도 뛰어나 선동열이 입단하기 전까지 해태의 초대에이스였으며 본인이 다닌 동신중학교 측에서 이 학교와 같은 재단인 동신고등학교 진학을 원했으나[2]광주일고 진학을 선택했고 이 과정에서 동신고가 강력하게 반발하여 동신고 야구부는 1975년 말 해체됐으며 중학교 때 포수, 고등학교 1학년 때 3루수로 활약했지만[3]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한 어깨를 인정받아[4] 투수로 전향했다.
1983년해태 타이거즈 첫 우승 당시 20승(13선발승)을 거두고도, 장명부(30승)(28선발승)에게 밀려 2위를 하였는데[5] 전반기의 오버페이스, 후반기의 체력조절도 하나의 이유였으며(장명부(28선발승) 김시진(14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3위) 이 해의 무리 탓인지 팔을 보호하기 위해 오른팔에 깁스를 하여[6] 다음 해에 10승(4선발승)으로 추락했고 1985년에는 아예 1승도 올리지 못했다.
역대 20승 투수 중 다승부분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선수는 이상윤이 유일하며 이후 1986년 10선발승으로 재기에 성공하여 80년대 초중반 김용남과 함께 타이거즈를 대표하는 투수에 올랐고,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는데 1987년에는 무릎수술[7] 후유증과 팔꿈치 부상[8]에 시달려 2승(모두 선발)으로 추락했으나 1988년 시즌에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며 16승(13선발승으로 윤학길과 선발승 공동 2위) 6패, 평균자책 2.89를 기록하며 선동렬(16승(9선발승) 5패)과 함께 쌍두마차로 해태의 통합우승 및 3연패에 크게 기여했다.
그 뒤, 1990년부터 2000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가 2001년부터 같은 팀(후반기부터 KIA)에서 수석코치를 맡았으며[9]2000년 말 3년 계약으로 부임했던 김성한 감독이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2002년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시즌 후 2년 재계약하자[10]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하지만, 김성한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2004년 시즌 중 도중하차한 데다 같은 해 말 유남호 감독이 부임하면서 생긴 개편에 따라 팀을 떠나[11]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으나 2군 운영에 변화를 주기 위한 삼성 측의 판단 아래 2005년 말 팀을 떠났으며[12] 현재는 광주에서 마트사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