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으로 관학유생이 되었으며 1681년(숙종 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1682년(숙종 8년) 교서관정자, 저작, 1683년1월 문신 전강에 불참했다 하여 파직되었다가 1684년 서용되었다. 그해 교서관 저작, 박사 등을 지냈다. 1684년의영고주부, 교서관 교리, 의영고 주부 등을 거쳐 1686년(숙종 12) 성균관전적, 교서관검교, 이듬해 저작 등을 거쳐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후 면직되었다. 1705년(숙종 31년) 교서관검교, 승문원검교 등을 거쳐 1709년제주도교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이 어렵다는 정장을 내고 사직했다. 최종 관직은 통훈대부광주군경안찰방(慶安察訪)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노인직으로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에 올랐다. 송곡 이서우와는 8촌간이고, 태화 이현상의 고조부가 된다. 대한제국의 법관 이재정(李在正)은 그의 6대손이 된다.
1648년(인조 26년) 7월 26일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영구(李英久)이고 어머니는 미상이다. 생부는 이경태이고 생모는 이집의 딸 전주이씨이다. 그는 생가 어머니를 통해 영해군 이당의 외손이고, 생조모 이애임(李愛任)을 통해서 선성군 이무생의 외손이 되지만, 생모와 생조모는 모두 서출이었다. 생모의 친정아버지 이집이 영해군 당의 5대손 이숙무의 서자였고, 생조모는 이홍주의 서녀였다. 자는 성택(聖澤), 설지(說之), 택보(澤甫)이다.
생가 8대조 이경연 혹은 6대조 이지방(李之芳)이 강원도강릉에서 경기도광주군언주면(현, 경기도성남시분당구대장동, 낙생동)으로 이주하여 광주언주에서 거주했지만, 포천 출신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되어 포천군일동면으로 이주하였다. 양아버지 이영구(李英久)의 가계는 조부 이규(李規), 증조부는 이여추(李汝樞)이다. 그러나 양자로 갔던 이영구와 이여추 이전의 가계는 실전되었다. 출생년대는 불분명하여 1648년생 설 외에도 1651년생 설, 1652년생 설 등이 있다. 족보에는 1652년생으로 기록되었으나 국조방목, 문과방목에는 모두 1648년생으로 나타난다.
그는 본생가로는 내의원 의관 이희헌(李希憲)의 4대손인데, 생가 할아버지 이원빈은 통덕랑으로 사마시에 합격한 뒤 동몽교관, 현감[1]을 역임했으며, 생가 할머니 전주이씨 이애임(全州李氏 李愛任)은 정종의 넷째 왕자 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의 5대손 영의정 충정공 이홍주의 서녀였다. 할머니 전주이씨 이애임의 친정어머니는 고령신씨 신순복(高靈申氏 申福順)으로, 신숙주의 5대손 진사 신례(申椽+忠+忠)의 노비 출신 첩 향운(香雲) 소생 서녀였다. 신례는 신숙주의 후손으로 정랑으로 승지에 추증된 신수경(申秀涇)의 아들이며 신수경은 신함(申涵)의 아들 혜숙옹주와 신항(申沆)의 양자가 되었다.[2] 생부 이경태는 사후 증 통훈대부 장악원정에 증직되었다.
생모 전주이씨는 세종대왕의 왕자 영해군 이당의 6대손 승의랑, 진용교위를 지낸 이집(李鏶)의 딸이고, 어머니는 영산신씨로 동지 신일(辛逸)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가선대부 이숙명(李俶命)이고, 증조부는 현령으로 증좌승지에 추증된 이덕수(李德壽)이며, 고조부는 선성수 이기(宣城守 李期)로, 영춘군(永春君 仁)의 6대손이다. 그러나 생가 외할아버지인 이집은 가선대부 이숙명의 서자였고, 이숙명의 양녀(良女) 소생 첩 순정(順貞)이 생모였다.[3]
초기 활동
생가는 경기도광주군낙생면과 언주면 일대에 살았으나 친족 이영구의 양자가 되면서 경기도포천군으로 이주했다. 이후 그는 이동면 장암리 배선동에 정착했고, 후손들은 일동면 유동리, 원통, 덕현, 기산리 등에 정착했다.그가 이영구(李英久)의 양자가 된 시점은 기록이 사라졌지만 1681년(숙종 7년) 문과에 응시할 때는 거주지는 경기도포천이었다.
그의 생부 이경태는 1691년(숙종 17년)까지 생존해 있었지만 국조방목, 문과방목에는 자시하로 되어 있다. 양부 이영구는 1678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문과방목 사본에는 그의 이름이 잘못 등재되어 있어 이상우(李尙宇)로 나타난다. 다른 문과방목, 국조방목에는 이상우로 등재되어 있지만, 그의 이름이 이상우(李尙宇)로 기록된 문과방목본 제5권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어느 학자의 문인이 되었는지 혹은 한성의 사부학당에 입학해서 수학했는지, 수학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훈련원주부 이정추(李廷樞)의 딸 학성이씨(鶴城李氏)와 혼인했는데, 장인 이정추는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판관, 훈련원주부 등을 역임했다. 처조부는 군자감판관 이언신(李彦信)이고, 처증조는 함안군수 이순광(李順光)이며 처고조는 이정숙(李貞淑) 또는 이천령(李千齡)이며, 통덕랑 직무(直武)의 5대손이다. 처삼촌은 이정량(李廷樑)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강화중군(江華中軍), 충청도병마절도사등을 역임다.
장남 이필수(李必壽)는 일찍 사망하고 차남 이익수는 관상감 교수를 역임하고 사후 증 호조참판에 추증됐으며, 셋째 아들 이인수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둘째 아들 이익수의 관직 경력은 족보에서 실전되었다가 2000년대 이후 조선 왕조 왕실 족보가 공개되면서 이익수의 사위 이동모(李東模, 서산군 이혜 11대손)의 기록에 敎官羽溪李益壽女英祖己酉生乙亥卒이라 하여, 이익수가 교관을 지낸 것과, 승정원일기에 관상감 겸교수 임명 기록이 확인되었다.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일찍이 유학으로 관학유생이 되었다. 1677년(숙종 3) 12월 15일숙종이 친히 전강을 실시할 때 유학으로서 전강에 서략(書略, 8등)하여 종이 4권, 필 4병, 먹 3개를 선물로 하사받았다. 같은 날 전강에서 상위 성적을 받은 유생들에게 자격을 부여할 때, 숙종의 명으로 예조로부터 일분(一分)을 하사받았다.[4][5] 그가 전강에서 심릉(沈棱) 등과 1분을 사급받은 것은 승정원일기, 전강등록에 나타난다. 그는 본가 쪽으로는 송곡 이서우와는 8촌간으로 1680년경신환국 당시에는 연좌되지 않았다.
1728년(영조 5) 1월 그의 서(庶) 9촌조카 이순관, 이익관, 서9촌조카사위 민관효 등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사형당했지만 그는 고령이라는 이유로 연좌되지 않았다.
그뒤 노인직으로 수계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馬+襄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1742년(영조 19) 8월 22일에 사망하였으며, 일설에는 1732년(영조 9)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사후
양아버지 이영구(李英久)의 가계는 조부 이규(李規), 증조부는 이여추(李汝樞)의 가계는 실전되어 1810년(순조 10) 이후에 편찬된 우계이씨의 족보에서는 그는 본생가로 환원되었다.
묘소는 경기도영평군 배상동(排上洞, 현, 경기도포천시이동면장암리(場岩里) 배상골(또는 배산골, 배선골 또는 배선동 부락)) 가리산 묘좌(卯坐)에 부인 학성이씨와 합장되었다. 장남 이필수는 5대손 대에 남자 후손이 단절되었지만 차남 이익수의 증손, 4대손이 태화 이현상이고, 5대손, 6대손, 7대손이 각각 분서 이봉녕, 이재명, 이휘선이고 삼남 이인수의 4대손이 대한제국 때의 법관 이재정, 5대손이 군수 이교선, 안산의 군청 주사 이민선, 6대손이 서울시의회 초대 시의원 이원찬 등이 태어났다.
그의 후손들은 이동면장암리 외에도 다른 아들 이인수는 근처 일동면유동리, 원통(圓通) 일대에 살았고, 생가 이복동생 이춘우(李春雨)는 근처 일동면기산리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포천시일동면 기산리, 유동리, 길명리와 주변 지역에 살게 되었다.
사후 손자 성석과 원석 등이 노인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으므로 그에게도 추은(追恩)으로 증직이 내려져 증(贈)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
묘비는 훼손되고 6.25 전쟁으로 일부 추가 훼손되면서 1995년10월 3일 후손이 세운 비석이 있다. 또한 망주석은 묘소 앞 약 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족 관계
그의 생가 누이 중 1명은 효령대군과 이간의 후손되는 이세빈에게 출가했다. 이세빈의 고조부 이경복의 동생이 완원군 이경유인데, 이경유의 딸은 그의 생가쪽 7촌아저씨 이경항의 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