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석보》(月印釋譜)는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1459년(세조 5년)에 간행한 목판본 불교 서적이다.[1] 초간본 10권(권1·2·7·8·9·10·13·14·17·18) 8책과 중간본 4권(권21·22·23·25) 4책이 보물 제745호로 지정되었으며, 초간본 2권(권11·12) 2책이 보물 제935호로 지정되어 있다.[2] 조선 전기 한국어 연구와 불교학 및 문헌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조선 왕조때 편찬된 석가 일대기로서는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초간본의 1권 맨 앞부분에는 훈민정음의 어제서문(御製序文)과 예의(例義) 부분이 한글로 번역된 '훈민정음 언해'가 실려 있는데,[3] 현재까지 발견된 책중에는 '훈민정음 언해'가 실려있는 최초의 문헌이다.
1447년(세종 29년)에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불교 서적을 참고하여 《석보상절》을 편찬했으며, 세종이 이 책을 읽고 한글로 직접 찬불가를 지었는데, 이것을 엮어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했다. 세조 5년에 이 두책을 합하여 월인석보를 간행했다. 편찬 동기는 1457년(세조 3년)에 사망한 아들 의경세자와 부왕 세종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라고 되어있지만,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당하는 정신적인 괴로움, 회한과 무상(無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추진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4]
신미(信眉), 수미(守眉), 설준(雪竣), 효운(曉雲), 지해(智海), 홍준(弘濬),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고승과 유학자 김수온(金守溫) 등으로 당대의 불학(佛學)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편찬작업에 함께 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의 한 구절씩을 본문으로 하고 그에 해당하는 내용의 《석보상절》은 주석(註釋)같이 하여 구성하였다.[5] 여러차례 복간된것으로 보이며 현존하는 책들은 경상북도 영주(榮州)의 희방사(喜方寺), 경상북도 안동(安東)의 경흥사(慶興寺), 충청남도 논산(論山)의 쌍계사(雙溪寺)에서 인쇄한 것들이다.[5]
구성
현존하는 책이 전질이 아니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지만 월인석보는 전체 25권인 것으로 추정된다.[6]
- 월인석보 권1~2(초간본, 보물 제745-1호, 서강대학교 도서관 소장)
- 권4(중간본, 개인 소장)[7]
- 월인석보 권7,8(초간본, 보물 제745-2호,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 월인석보 권9,10(초간본, 보물 제745-3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월인석보 권11, 12(초간본, 보물 제935호, 삼성박물관 리움 소장)
- 월인석보 권13,14(초간본, 보물 제745-4호,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월인석보 권15(초간본, 보물 제745-10호, 구암사 소장)
- 권15(초간본, 성암고서박물관 소장)[7]
- 월인석보 권17~18(초간본, 보물 제745-5호, 수타사 소장)
- 권19(초간본, 가야대학교 소장)[8]
- 월인석보 권20(보물 제745-11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 월인석보 권21(중간본, 보물 제745-6호, 삼성박물관 리움 소장)
- 권21(초간본, 광흥사 소장)[9]
- 월인석보 권22(중간본, 보물 제745-7호, 개인 소장)
- 월인석보 권23(초간본, 보물 제745-8호, 개인 소장)
- 월인석보 권25(보물 제745-9호, 보림사 소장)
목판
1569년(선조 2년) 새긴 월인석보의 목판 중 일부가 갑사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중 일부가 보물 제582호로 지정되어 있다.
희방사에도 1568년(선조 1년)에 새긴 목판이 있었으나 한국 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10]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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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석보》 제9·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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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에 전시된 월인석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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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에 전시된 월인석보 설명
각주
외부 링크
- 월인석보 - 디지털한글박물관
- 아래 링크에서 원문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