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주 포레스트 태생으로 부모는 남부와 중서부를 표표하는 이주 노동자였다. 1926년 가족은 미시시피주로 돌아와 복음성가를 노래했다. 동리 블루스 음악가 파파 하비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포레스트 인근의 무도장 및 카페에서 연예했다. 1940년대경 시카코로 이주했다.[3]
음악가 경력
미시시피주 클라크데일에서 블루스 가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하모나이징 포의 일원으로서 1939년 시카고에 방문했다. 시카고에서 단독 음악가로 성립하려 했지만 길거리 가수로서 연명하는 게 고작이었다. 포장 상자에서 사는 크루덥을 우연히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는 음반 프로듀서 레스터 멜로스는, 그를 탐파 레드에게 소개시켜 주고 RCA 빅터의 블루버드사에 녹음 계약을 맺게 해 주었다.[3] 탐파 레드는 크루덥에게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할 수 없다면, 그 일은 잊어버려라."고 조언했다.[4]
크루덥은 저작료 분쟁으로 1950년대를 임시해 녹음을 중단한다.[4] "모두가 내 덕에 부자가 되었지만, 나는 홀로 가난했다."고 말하기도 했다.[6] 시카고에서 행한 세션은 1951년이 마지막이었다. 1952년 ~ 54년 빅터 녹음 세션은 조지아주 애틀랜틱에서 진행되었다. 파이어 레코드와 델마크 레코드에서 녹음업에 복귀하면서 1965년 순회공연도 떠났다.[5] 여기서 "로큰롤의 아버지"라고 홍보될 때는 다소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 별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4] 이즈음의 크루덥은 가수로서 받는 저임금을 보강하게끔 노동자로 종사했다. 저작료도 받지 못한 형편이었다. 멜로스와 저작료를 두고 싸운 뒤 미시시피주로 건너가 밀주를 생업으로 삼았다. 이후 버지니아주로 이주해 농사꾼에 종업하며 세 명의 아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피붙이들과 살았다. 주류 업체에서 더러 노래하면서 밀주를 공급했다. 그중 한 곳은 노샘프턴 컨트리에 위치한 듀드롭 여관이란 곳이다.
말년
1968년 블루스 홍보업자 딕 워터맨이 크루덥의 저작료를 위해 투쟁, 크루덥에 60,000달러를 지불하는 합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저작료를 지불하기로 된 힐 앤 레인지는 소송으로 더 이상의 돈을 잃을 수 없다고 판단, 종국에 가서 서류 서명을 거부했다.[6] 1970년대 초에는 버지니아주 운동가 실리아 산티아고와 마가렛 카터가 조력해 마땅한 저작료를 받아내기 위해 힘썼으나 소폭적인 성공에 그쳤다. 1971년경, 크루덥은 미국 작곡가 조합의 중재를 통해 밀린 저작료로서 10,000달러 이상 금액을 받았다.[7] 1970년 영국 여행 적에는 현지 음악인들과 "로벅 맨(Roebuck Man)" 명의로 녹음을 진행했다.[4] 마지막으로 행한 전문 참사는 보니 레이트와 행한 것이다.[4]
사망
저작료 합의 실패에서 4년이 흐른 1974년, 크루덥은 숨을 거두었다.[6] 사망 일자는 그가 사용한 숱한 명의로 인해 다소 혼란이 있으며, 그 명의 가운데는 형제자매의 것도 있다. 심장병과 당뇨병의 중첩으로 1974년 3월 버지니아주 노샘프턴 컨트리의 나사와독스 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8][9]
유산
포레스트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미시시피 블루스 트레일 명판이 건립돼 있다.[10]엘비스 프레슬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크루덥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내게 꿈이란 게 있었다면, 아서 크루덥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6]
각주
↑Eagle, Bob; LeBlanc, Eric S. (2013). 《Blues: A Regional Experience》. Santa Barbara, California: Praeger. 112쪽. ISBN978-0313344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