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정책

북진정책(北進政策)은 고려 건국 초기부터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내세운 태조 이래 고려에서 적극 추진했던 정책이다.

변천

태조

태조는 고구려 옛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태조는 건국 얼마 후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평양대도호부로 삼았다가 곧 서경(西京)이라 명명하고 수도인 개경에 버금가게 중시하였다. 그리고 태조는 자주 서경에 직접 행차하여 국경을 살펴보았는데, 이러한 노력의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훈인 훈요 10조에서도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니 만대 왕업의 땅이다. 마땅히 사계절의 중월(仲月)에는 행차하여 백 날이 넘도록 머물러 나라의 안녕(安寧)을 이루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또 태조는 북진정책의 일환 중 하나로발해를 멸망시킨 원흉이자 북진정책 추진의 걸림돌인 거란을 적대시하였다.

전기

태조 사후 북진정책은 고려의 대외정책으로 자리잡았다. 그 일환으로 전기에 1차 고려-거란 전쟁서희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 6주를 획득하고 압록강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 후 윤관이 조직한 별무반의 활약으로 동북 9성을 개척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수비가 어렵고 여진족이 반환을 부탁하여 1년 만에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였다.

중기

세력이 강성해진 여진족은 완안아골타금나라를 새우고 고려에 군신 관계를 강요해 왔다.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요구해온 군신관계를 수용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고,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서경의 분사제도가 폐지되면서 퇴조해 갔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태조가 훈요 10조에서 중시하라고 강조한 서경이 역적의 땅이라 취급받게 된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그리고 문벌귀족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옅어지면서 북진정책은 큰 손상을 입었다.

후기

몽골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가 설치되는 등 오히려 영토를 상실하기도 하였다. 이후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고려의 간청으로 반환되었지만, 쌍성총관부는 존속하였다. 이후 공민왕은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탈환하고 옛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요동 지역을 잠깐 점령하였다. 이로써 태조 이래 추진되던 북진정책이 빛을 발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고려는 명나라의 압박으로 요동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멸망 때까지 북진정책은 추진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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