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적지였던 경기도부평도호부 하오정면 고리동(지금의 경기도 부천시오정구 고강동 313번지)이며, 한성부 남서 회현방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자퇴하고,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1918년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에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을 지냈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민족 의식을 시로 표현하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술이라 하면 수주(변영로)를 뛰어넘을 자가 없고 담배라 하면 공초(오상순)를 뛰어넘을 자가 없다."라는 유행어가 한때 1950년대 중반에 서울 항간에서 난무했는데 이는 당시 시인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가 알아주는 애주가였고 시인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이 알아주는 애연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화
시인 수주 변영로가 자신의 단골 주점인 《은성》 주인 이명숙의 아들 최불암이 서라벌예술대학에 합격하자 막걸리잔을 내빌고 술을 한잔 주었다. 하지만 최불암이 막걸리잔에 뜬 술지게미는 손으로 걷어서 내버리자, 변영로는 이놈이 음식을 함부로 버린다고 화를 내며 즉석에서 귀뺨을 후려쳤다 한다.
변영로는 동창이자 절친인 윤치영과 함께 중학교 수업이나 YMCA 학당 강의를 빼먹고 땡땡이를 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한번은 이를 본 중앙중학교 교사이자 YMCA 학당 강사인 월남 이상재가 변영로 일행이 있는 곳을 보고는 변정상씨, 변정상씨 하고 계속 불렀다. 화가난 변영로가 이상재에게 선생님 치매걸리셨습니까? 왜 남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십니까? 하자 이상재는 변정상이 내 친구이다. 그런데 네가 변정상의 씨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의 씨란 말이냐? 라고 답했다 한다. 이상재의 기지는 변정상의 회고록과 이를 지켜본 윤치영의 자서전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