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에 아버지 보소가 사망하자 숙부 리샤르가 섭정이 되었으나, 그를 보호하기를 주저했다.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의 부탁으로 동프랑크의 카를 3세의 보호를 받았고, 나중에는 아르눌프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그의 보호를 받았다. 890년에 프로방스 왕이 되고, 900년프리울리 출신 롬바르디아의 왕 베렌가리오 1세에 반대하는 롬바르디아 귀족들의 추대로 10월 파비아에서 롬바르디아의 왕으로 선출되고 901년2월로마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4세의 축성을 받고 신성 로마 황제관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베렌가리오 1세와의 오랜 전쟁 끝에 905년7월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베렝가리오에게 포로로 잡혀 그에게 두 눈을 뽑히고 프로방스로 추방되었다. 그의 별명 맹인왕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의 고모 리첼다는 서프랑크의 대머리왕 카롤루스 2세 칼부스의 후처였고, 삼촌 오툉 공작 리샤르는 후일 서프랑크의 왕이 되는 라울의 아버지가 된다. 삼촌인 리샤르는 그가 고아가 되자, 그를 보호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밖에 루도비쿠스의 할머니 리첼다는 장로 보소의 딸로,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의 처 토이트베르가의 자매이자, 성 마우리스-인-발레 대 수도원장 훅베르트와 남매간이었다.
그밖에 루도비쿠스에게는 어머니가 누군지 불분명한 샤를 콘스탄틴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후에 비엔나백작을 역임했다.
882년 하순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로망 3세가 군사를 이끌고 프로방스와 부르군트를 침공, 한 달 정도 포위했다. 삼촌 리샤르 오툉은 이르멘가르트와 어린 루도비쿠스는 누이 엔젤베르가를 오툉으로 피신시켰다. 서프랑크의 샤를로망 3세가 퇴각한 뒤 다시 프로방스로 돌아왔다.
프로방스 왕
887년1월 11일 아버지 보소 5세가 죽자 그는 프로방스의 왕이 되었는데 나이가 어려 권력이 불안하였다. 혼란을 틈타 하부 부르고뉴(아를 지방)은 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귀족들이 독자적으로 치안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섭정으로는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와 친 삼촌 정의공 리샤르 오툉이 그를 대신하여 왕국을 다스렸다. 어머니 이르밍가르트는 프로방스의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그러나 삼촌 리샤르 오툉은 그를 보호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프로방스의 군주로서 그는 외할아버지 루트비히 2세 이탈리아인, 서프랑크의 말더듬이 루트비히에 이어 루이 4세에 해당되지만, 이탈이아의 왕이자 황제로는 루트비히 3세가 되어 루트비히 3세로 통칭된다.
887년5월 그의 어머니 이르밍가르트는 아들과 함께 친척인 동프랑크의 황제 뚱보왕 카를 3세에게 의탁하여 도움을 요청하였고,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의 사촌이었던 카를 3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상속권과 왕의 지위를 인정, 보호해 주었다. 또한 그에게 비엔나백작의 작위도 내려주었다. 그러나 887년11월 카를이 조카 아르눌프의 쿠데타로 실각하고, 888년1월 카를이 죽자, 다시 카를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케른텐의 아르눌프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르눌프는 그가 아르눌프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봉신이 될 것을 인정하자, 아르눌프는 890년 루도비쿠스를 아를, 프로방스 그리고 부르고뉴의 왕으로 인정해고 보호해 주었고, Visio Karoli Grossi를 작성하여 그를 카롤링거 왕가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랭스의 대주교 풀크에 의하면 901년 그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작성했다고도 한다.
그의 누이 윌라는 상부르군트의 왕 루돌프 1세와 결혼했고, 루도비쿠스 맹인왕은 다시 상부르군트의 왕 루돌프 1세의 딸이자 조카딸인 아델라이드와 결혼했다. 루돌프 1세의 누이인 아델라이드는 그의 숙모로, 루도비쿠스의 삼촌 리샤르 오툉의 아내였다. 루돌프의 딸 윌라는 다시 그의 먼 인척인 토스카나의 보소와 결혼했다.[2]898년 그의 여동생 엔젤베르그는 아키텐공작이자 리옹 공작, 마콘 백작인 윌리엄 경건공과 결혼, 동맹을 얻게 된다.
889년사라센인이 프로방스의 프락시네툼(Fraxinetum, 현 프락시네(Fraxinetum))에 요새를 건설하고, 프로방스의 해안가를 약탈하는 사라센인 해적들과 교전하였다. 889년5월 루도비쿠스는 어머니 이르밍가르트와 동프랑크의 아헨으로 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돌아왔다. 다시 894년 루도비쿠스는 동프랑크로 가 아르눌프에게 충성을 약속하고 봉신이 되었다. 890년발랑스(Valence)의 프로방스의 가톨릭 성직자 회의에서 그를 프로방스와 부르고뉴의 국왕으로 선출,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루도비쿠스는 치세 동안 내내 사라센의 침입에 맞서 싸워야 했다. 896년프로방스의 남부 해안가로 쳐들어온 사라센인 해적과 교전하였다. 898년에는 프락시네트 해변가로 올라오는 사라센 군사를 맞아 교전하였다. 같은 해, 루도비쿠스는 아키텐을 방문했는데, 루도비쿠스의 여동생 엔젤베르그(Engelberge)는 아키텐의 공작이자 레온, 마콘(Mâcon)의 백작인 경건한 윌리엄과 결혼하였다.[3] 루도비쿠스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레오 6세의 딸 비잔티움의 안나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그의 전임자들을 대하듯 그를 프랑크인의 황제로 여겼지 로마 황제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902년까지 그는 마자르 족의 이탈리아 약탈을 물리치지 못했고, 루도비쿠스를 지지하던 일부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다시 베렝가리오의 편으로 돌아섰다. 902년베렝가리오 1세는 그에게 프로방스로 돌아가라고 강요했고, 루도비쿠스는 거절했다. 902년 그는 베렝가리오에게 패하여 영원히 이탈리아를 떠나는 서약을 하고 프로방스로 물러났다.[6]
904년이탈리아를 재공략하여 롬바르디아의 북서부를 획득하였다. 905년 루도비쿠스는 다시 이탈리아로 와 달라는 이탈리아인 귀족들의 제의를 받았다. 그에게 이탈리아 방문을 제의한 귀족들 중에는 이브레아후작이브레아의 아달베르토 1세도 있었다. 루도비쿠스는 이탈리아의 공략을 준비한다. 다시 한번 그는 파비아에서 베렌가리오 1세 군사를 물리치고 입성하였으며, 베로나 시와 주교 아달하르트(Adalard) 등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패배와 최후
905년이브레아의 후작 아달베르토 1세가 루도비쿠스의 이탈리아로 초청했다. 905년7월 그는 다시한번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하는데, 파비아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를 물리치고 베로나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바이에른 군대의 도움을 받은 베렝가리오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베로나 시내에서 베렝가리오의 군사에게 위치가 노출된 그는 성 페트로의 교회의 성소 안에 숨었지만, 붙잡혀 베로나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905년7월 21일 그는 서약을 깬 죄목으로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고 (그래서 그의 별명이 맹인왕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황제의 지위를 포기해야 했다. 이것이 카롤링거 왕조가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것이었고 실패로 끝났다. 베렝가리오는 그가 다시는 이탈리아에 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를 풀어주었다.[7]
프로방스의 당시 수도인 빈으로 돌아온 루도비쿠스는 그후로도 몇 년간 프로방스를 통치했지만, 911년 이후 사실상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실권은 루도비쿠스의 매제이자 먼 친척으로 할머니 리첼디스의 조카손자였던 아를의 백작이자 비엔나백작인 위그에게 있었다. 위그는 할머니 리첼디스의 친정오라비 훅베르트의 손자였고, 루도비쿠스의 여동생이자, 상부르군트의 왕 루돌프 1세의 미망인이었던 윌라와 결혼했다. 루도비쿠스는 무력해졌고 프로방스 지역 영주들과 귀족들의 이런저런 요구에 저항하지 못했다.
911년 루도비쿠스는 위그를 프로방스후작에 임명했다. 924년 루도비쿠스의 여동생 윌라가 죽은 뒤에도 위그는 재혼하지 않고, 프로방스에서 정치적 실권을 행사했다. 크리스찬 스테파니에 의하면 귀족들의 요구에 저항할 수 없었던 루도비쿠스가 위그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장님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로마 황제라 칭하고, 행동에 있어서 로마 황제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였다.
루도비쿠스는 이탈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924년이탈리아 북부의 귀족들의 초빙을 받은 상부르고뉴의 루돌프 2세가 이탈리아의 왕위를 차지했는데, 928년 아를의 위그에게 지위를 양도하였다. 한편 프로방스의 섭정이자 후작인 위그 역시 루도비쿠스가 살아있던 926년7월 9일이탈리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루도비쿠스는 928년7월 5일프로방스의 아를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루도비쿠스 1세 경건왕과 그의 외할아버지 루도비쿠스 2세 이탈리아왕, 그리고 루도비쿠스 2세 이탈리아왕 사후 프로방스와 부르군트를 차지한 카롤루스 2세 대머리왕의 아들 루도비쿠스 2세 말더듬이왕에 이어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군주로는 네번째 루도비쿠스가 된다.
↑장로 보소의 딸 리첼디스(Richildis)는 고르즈의 비빈과 결혼했고, 이들은 루도비코의 아버지 보소 5세의 부모가 된다. 장로 보소의 아들 훅베르트의 아들이 아를의 테오발트이고, 테오발트의 아들이 토스카나의 보소와, 그의 매제이자 여동생의 2번째 남편 위그 형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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