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진미네·요코보리·도요미 등은 1923년에 궁내성 어료목장의 2,000 정보가 매각되어[15]메이지 시대-다이쇼 시대에 개간된 취락들이었다. 도쿄신전(新田)은 이 지역에서 행해진 개간지 중에서 특히 오래된 것으로, 미츠이 하치우에몬 등 부호들의 출자에 의해 설립된 개간회사에[13] 고용된 도쿄궁민(東京窮民)들이 개간을 수행했다. 이들 도쿄궁민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실직한 하급 무사·무가의 고용인·유랑민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태풍 피해 등 어려움에 직면하자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자가 속출했다.[16] 개간회사는 결국 실적 부진으로 폐업하지만, 이 땅에 머물러 개간을 계속한 도쿄궁민이나 떠나간 도쿄궁민으로부터 농지를 취득한 농민들은 그 소작료 상납과 토지 소유를 놓고 지조개정으로 지권을 얻은 도쿄의 거상들과 긴 재판 투쟁을 통해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이 지역의 농민들에게는 토지에 대한 집착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13][16]
60년대 신도쿄 국제공항의 건설이 결정되자 공항 건설을 둘러싸고 산리즈카 투쟁(나리타 공항 문제)가 발생했으며 공항 반대 운동의 거점이 된 지역 중 하나이며 1971년에는 일본환야제도 덴진미네에서 개최되었다.[17]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이 열린 이후에도 이 협의에 참여하지 않은 반대동맹 기타하라파를 중심으로 덴진미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인근 B활주로와 유도로 주변에는 미매수자가 많이 존재한다. 또한 한 때 나리타 신법의 적용 대상이었던 덴진미네 현지투쟁본부(단결소옥)도 있었다.[9]
또한 B활주로 동쪽에는 "개척조합로"라고 부르는 반대파의 일평공유지가 공항 부지 안으로 파고드는 형태로 존재했다.
↑경작지를 둘러싸고 임대차 계약 해지를 요구하는 공항공사 측의 소송과 기타하라파 농민의 이의 소송이 있었으나 모두 기타하라파 농민의 패소가 확정된 상태이다.[9][10] 공안조사청은 기타하라파의 농지가 비록 미미하지만 2기 지구 내에 존재하는 것들은 중핵파를 비롯한 기타하라파 지지 세력에게 산리즈카 농민을 지원한다는 "매우 훌륭한 명분"이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