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5일, 시리아의 대도시인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서 수백명이 민주화 시위를 시작했다. 이 시위는 이후 시리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3월 18일 금요일, 시위는 4개 도시에서 분화하여 다라 시에서 시위대 수천명이 정부 부패에 대해 항의하는, 가장 큰 시위가 열렸다. 다라 시에서 열린 시위는 시리아 보안군이 총격하여 시위대 4명이 사망했다. 다라 시는 시위가 크게 일어난 도시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3월 20일, 다라 시에서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서 국가비상사태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보안군이 시위대에 총격하여 1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도시의 바트당 소속 당본부가 위치한 법원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사촌인 라미 마칼로프가 소유한 시리아텔 건물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이 충돌로 경찰관 7명이 사망했다.[8]
3월 23일, 보안군이 다라 시 중앙의 오마리 모스크 근처에서 천 명의 시위대에게 사격하여 적어도 37명 이상이 사망했다.
4월 8일, 다라 시에서 보안군과 시위대 간 큰 충돌로 시위대 27명과 보안군 19명이 사망했다.[9] 4월 22일 시리아 전역에서 열린 "위대한 금요일" 시위로 인해, 알자지라에서는 다라 시에서 적어도 100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4월 25일: 다라 거주자가 3월 15일부터 시위대에게 사용했던 탱크를 그날 새벽이 대략 수백명에서 6,000명 정도 되는 병력과 함께 도시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 병력은 3개의 작은 모스크를 점령하고 시위대의 본부 역할을 하던 오마리 모스크를 점령하려고 시도했다. 물, 전기, 통신이 끊겼고 모스크 지붕에 저격수가 배치되었으며[11] 그들이 시민에게 발포했으며[13] 정부군과 비정규군이 섞인 병력이[11] 총과 칼을 들고[13] 집집마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을 끌어냈다.[11]
동튼 직후 군의 공격으로 수십명이 사망했다.[14] 위성 통신으로 연락한 거주자와의 인터뷰에서 거리 곳곳에 시체가 있으며 총에 맞을 수 있어서 이 시체들을 수습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인터뷰에서 그 거주민은 "그들은 시리아에게 다라의 교훈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11]
4월 26일: 인권 단체에 따르면, 다라 거주민 수십명이 보안군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13]AP통신의 다라 거주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이곳은 대량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했다.[13]
4월 28일: 알자지라가 발표한 아마추어 비디오 촬영가의 동영상에 따르면, 다라의 군인들이 총격을 거부하거나 탈영하고 있으며, 그들은 군의 총격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시민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정부는 즉시 이러한 보고에 나온 사항을 부인했다.[15]
알자지라에 따르면, 다라 거주민들은 아직까지도 곳곳에 배치된 저격수가 계속 총을 쏘기 때문에 집에서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16] 알자지라 및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4월 25일부터 28일 사이 최소 42~50명의 사람들이 보안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6][17]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에서 다라 거주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육군 사단 또는 여단 전체가 사라져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리아는 외국 저널리스트에 대한 입국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나 주장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7]
↑Al Jazeera’s correspondent Rula Amin, Damascus, in video clip at 12:59 pm, 28Apr2011, in:“Syria Live Blog – 28 April”. Al Jazeera English. 2011년 4월 28일. 2011년 4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1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