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충격(닉슨衝擊, 영어: Nixon shock 닉슨 쇼크[*][1])은 1971년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이 취한 일련의 경제 조치를 말하며, 가장 주요한 조치는 미국 달러와 금 사이의 태환 제도를 일방적으로 폐지한 것이다.
닉슨의 조치는 공식적으로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으나, 브레튼 우즈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를 중지시키면서 체제를 사실상 무너뜨렸다. 닉슨은 브레튼 우즈 체제의 개혁이 이루어지면 달러의 금태환 제도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혔으나,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1973년에 이르러 브레튼 우즈 체제는 사실상 변동 환율불환 제도로 대체됐다.
배경
1944년미국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에 44개 나라에서 온 대표들이 모여 새로운 통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논의했고 이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가 생겨났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은 브레튼 우즈 체제가 환율의 안정을 보장하고, 경쟁적인 평가 절하를 막으며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를 바랐다.[2]1958년부터 브레튼 우즈 체제가 전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으며, 각 나라들의 돈은 달러에 고정됐고 금 1온스는 35달러의 고정 환율로 바꿀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의 밖에 있는 달러를 금으로 지지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두고 미국 시민이 아닌 시민들이 미국의 생활 수준을 지지하고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을 보조하게 되는 불균형적인 재정 제도를 낳는 '미국의 과다한 특권'이라고 했다. 미국의 경제학자배리 아이켄그린은 미국 조폐국이 100달러 지폐를 만드는 데에는 겨우 몇 센트밖에 들지 않지만 다른 나라들이 100달러 지폐를 얻으려면 100달러만큼의 물건을 팔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1965년2월프랑스의 대통령샤를 드 골은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금과 공식적인 환율로 바꿀 의향을 밝히기도 했다. 1966년에는 미국 이외의 나라들은 각국의 중앙은행에 140억 달러 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단지 132억 달러 만큼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이 금 보유량 가운데 국내 보유 자산을 보장하는 양을 빼면 단지 32억 달러 만큼만의 해외 자산을 지지할 수 있었다.[5]
2011년에 폴 볼커는 브레튼 우즈 체제를 포기한 것을 후회한다고 밝혔다. 볼커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있으며, 유럽은 불확실성과 함께 살 수 없었고 자신들만의 통화를 만들었지만 현재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4]1996년에 경제학자폴 크루그먼은 닉슨 충격 이후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오늘날의 세계 통화 제도에서 금은 어떠한 특별한 지위도 갖고 있지 않다. 연방준비제도는 달러를 그 어떤 것과도 고정해야할 의무가 없다. 연방준비제도는 적절하다고 여기는 만큼 많이 또는 적게 돈을 만들 수 있다. 그러한 자유로운 제도에는 큰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연방준비제도는 실재하거나 임박한 경기 후퇴에 돈을 공급함으로서 대응할 수 있다. 한 예를 들자면 그 유동성으로 인해 (검은 목요일이 일으켰던 모든 무서운 것들을 일으킨) 검은 월요일에서 실물 경제의 침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변동 환율 통화는 이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도 갖고 있다. 한 예로, 변동 환율제는 세계 무역상들과 투자자들에게 불확실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지난 5년동안 달러는 많게는 120엔에서 적게는 80엔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이 변동성의 비용은 (복잡한 금융 시장은 사업체들이 변동성으로 인한 위험을 없앨 수 있게 하는 점도 있어서) 측정하기 어렵지만 상당할 것이다. 더욱이 자산 전문가들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체제는 그들이 동시에 무책임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하며, 몇몇 나라에서는 이미 그들이 그러한 기회를 재빨리 얻었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