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학 중에 박승희, 이서구와 함께 토월회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문예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강점기 활동
1923년에는 배재고보 동창인 박영희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조직했고, 파스큘라가 1925년카프로 발전하면서 박영희와 더불어 카프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백조》 동인으로 시 〈애련모사〉(1923)를 발표하며 등단하여 파스큘라와 카프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경향파 시와 소설, 수필 등을 활발히 창작했다.
이 시기의 대표 평론으로는〈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문예사상과 사회사상〉(1927), 〈프로문예의 대중화 문제〉(1929)이 있고 정치에 문학이 종속되는 전형적인 참여문학적 경향을 보였으나, 차츰 문학의 형식성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성향이 변화되어 형식의 중요성을 낮게 보는 박영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의 연장에서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맑스주의 통속소설"의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으며, 후에 투철한 경향성을 내세운 카프 소장파 김두용, 임화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소설로는〈붉은 쥐〉(1924),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광복 후에는 출판사인 애지사를 설립해 경영하다가 한국 전쟁 때 서울이 조선인민군에 점령되자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회부된 뒤 즉석에서 사형 판결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겼다. 타살형이 집행되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기진은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참전하였고,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며 대표적인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관제 조직인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을 지내기도 했다.《경향신문》 주필을 거쳤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고문을 지냈다.[출처 필요]
1936년 《청년 김옥균》을 발표한 이래 점차 역사소설에 관심을 보였는데, 광복 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초한지》(1984) 등 역사소설을 많이 발표했다. 1978년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사망 후 1989년문학과지성사에서 전7권의 《김팔봉문학전집》이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