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 중면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중현(重顯)과 형제의 의를 끊고, 1907년의 정미칠조약을 계기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권태훈은 이러한 특수한 가계와 집안분위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어머니로부터 6세 때 조식법(調息法)을 배웠다.
10세 때인 1910년에는 서울 종로구 마동(麻洞)에 있는 단군교 포교당에서 나철(羅喆) 대종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충청북도 영동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수학 등 근대학문을 접하였는데, 이 때 일본유람단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활동
3.1운동 이후에는 만주에서 독립전쟁에 참여하였고, 국내로 잠입하여 지하운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에 한독당(韓獨黨)에 가입하는 등 정치운동에 나섰으나 고난을 치렀다. 60세 때에 공주에 연정원(硏精院)을 신축하여 수련을 하다가 65세 때에 상경하여 한의원을 개업, 83세가 되는 1982년에 대종교의 최고지위인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1984년에는 베스트셀러 《단(丹)》이란 소설을 통해서 선인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1986년에는 한국단학회 연정원을 설립하고 총재에 취임하였다.
1990년 공산 러시아 수교 직후에 공중파 TV방송으로 평일 오후 비정규 편성 시간대로 생중계된 독립군 유해 송환 행사는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출발한 전세기가 도착한 서울 공항에서 있었는데 카톨릭, 불교, 대종교로 이루어진 국내 3대 종교 대표들의 종교별 위령 식순에서 3번째로 대종교의 위령 의식을 진행하였다.
한국단학회 연정원을 설립하였으나 평소 역사나 풍습, 대종교에 총전교로서 활동한 종교 분야에서 항상 환국이라는 표현만을 사용하였다. 단체 이름에서 한국은 지역이나 지점의 명칭으로 당대에 아주 흔하던 관습 표기이며, 그런 표기 용례에 따라 단체의 줄임말에서는 제외되며 표기한다.
일본인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는 민족구성원에 관련한 봉우 선생의 견해를 《봉우일기》에서 아주 짧게 접할 수 있다.